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나무 Aug 11. 2018

#14. 미식의 기쁨

미각의 범위가 확장되는 즐거움

회사에서 상사를 위해 예약만 하던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미슐랭 별을 단 고오급 식당은 아니지만 미슐랭 가이드에 가격 대비 맛 좋은 곳(Bib Gourmand)으로 평가된 15구의 작은 프렌치 식당이었다. 아뮤즈 부슈, 전식, 본식, 디저트까지 형형색색 정성스레 수 놓인 접시가 능숙하게 서브되었다. 별 기대 없이 차례차례 맛보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분명 익숙한 재료들인데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맛. 특히 오목한 사기그릇에 담긴 디저트는 달고 부드럽고 탱글거리고 쌉쌀하고 차갑고 오독거리는 총천연색 맛이 입 속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지는데, 나도 모르게 커지는 동공과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느라 애써야 했다.  


나와 동석한 사람들은 겨우 이 정도의 요리를 놓고 그렇게 감탄하냐고 웃겠지만, 미식의 경험이 적은 나로서는 이렇게 신선하게 충격적인 요리는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맛있다"는 단어가 어떤 경험을 묘사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다는 말만큼 광범위하고 막연하며 둔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여러 가지 맛이 겹겹이 혹은 뿔뿔이 포진하고 있어 미각을 환상적으로 폭발시키는 요리가 있다면, 세상의 다양하고 섬세한 수식어를 모조리 끌어와야 설명이 된다. 그런 접시를 두고 "맛있다" 한마디로 퉁치는 것은 세상 야박하고 서운한 일. 즐거웠다. 여러모로 불편한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식사는 분명 즐거웠다. 이렇게 '온전히 음식만으로' 즐거울 수 있는 이 경험이 낯설어서 요즘의 나는 미식의 즐거움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입맛이 없었던 적이 별로 없고 입 짧은 게 뭔지 모르는 나는 기본적으로 먹순이지만 의외로(!) 내게는 미식의 취미가 없다. 근접성이 좋은 곳에서 맛 좋은 음식을 먹게 되는 일은 썩 기분 좋지만, 먼 지역에 있는 식당을 애써 찾아가거나 뭔가를 먹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은 내 인생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내 미뢰의 경험치는 낮고 기대치는 더욱 낮다. 그러니까, 내 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그리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다. 적당한 수준의 달고 맵고 짭짤한 자극이면 빠르게 만족하는 나의 미뢰들. 그래서 보통 내 식(食) 경험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단순하다. 맛이 있거나 아니면 없거나. "감칠맛"이라든지 "풍미"라든지 하는 말들은 내 입술로는 좀체 빚어본 적이 없는 티브이 음식 프로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내게 미식의 취미가 없다고 생각한 또 다른 이유는 흔히 미식으로 대표되는 고급 식재료들이 어렵고 입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회사 행사 때 등장하는 어란이나 푸아그라는 친절하게 입에 넣어준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대표 품목이다. 그렇지만 부담스럽고 값비싼 재료를 쓴 게 아니라 익숙한 재료들로 상상치 못한 미각 체험을 선사하는 것이 미식이라면 나도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빠듯한 월급으로 자주 즐길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미맹 인생 3n 년만에 알아 가는 요즘.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 확실히 미각의 범위가 확장된 것 같기는 하다. 이곳에서 오래 만났던 옛 애인의 역할이 컸는데, 그는 양료리라면 파스타와 스테이크 밖에 모르던 내 식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떠났다. 치즈류 극혐이었던 내가 쿰쿰한 콩테 치즈를 (무려 먹고 싶어서!) 사기 위해 시장으로 향할 때나, 짜고 기름져서 싫었던 훈제 연어를 블리니 위에 척 올리고 생크림까지 얹어 슥슥 잘라 맛있게 먹을 때 나도 내가 놀랍다. 느끼해서 싫었던 아보카도도 이제는 씨를 파낸 자리에 참치와 마요네즈를 버무려 채운 후 작은 숟가락으로 뚝뚝 떠먹는다. 프누이의 향긋하고 아삭이는 살결, 오독오독 부서지는 생 컬리플라워, 큐민을 잔뜩 뿌린 볶은 당근, 야생 타임을 넣고 달달 볶은 애호박, 코코넛 오일에 버무린 깍지콩의 맛도 내 혀 위에 데이터 베이스로 차곡차곡 쌓여있다.


최근 프랑스에서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데, "다양한 식경험" 항목에 "미식의 즐거움을 부지런히 찾는 것"이 추가되었다. 불을 쓰는 것이 싫고 (덥다), 굳이 요리를 해 먹고 싶지는 않아 (손이 많이 가고... 귀찮다) 식단의 팔 할이 구운 계란 (주말에 18구짜리 계란 한 판을 전기 압력 밥솥에 구워놓고 일주일 내내 먹는다)과 시리얼이었던 우울한 요즘을 반성하며. 이제부터는 열심히 벌고 살뜰하게 아껴서 가끔 섬세하고 맛 좋은 요리를 사 먹는 즐거움도 누려야지. 열린 마음으로 내 좁은 미각의 범위도 한 뼘 더 확장되었으면.


작가의 이전글 #13. T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