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나무 Aug 13. 2018

#15. 다름에 관하여

다름에 대처하는 외국인의 자세

해외 생활의 필수 아이템을 딱 하나만 꼽자면 '다름과 낯섦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외에 딱히 '필수'랄 것은 없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다 비슷비슷하여 웬만한 것은 다 있거나 대체제가 있고, 최악의 경우 없는 대로 이럭저럭 살게 된다. 다만 생활 곳곳에서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불유쾌한 다름을 견딜 수 없다면 생활은 속수무책으로 괴로워진다 (화병을 앓다가 결국 체념의 단계로 넘어가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나 역시 수많은 다름에 적응해야 했다. 좁아 터진 낡은 지하철, 지린내 나는 강변 산책로, 신출귀몰한 소매치기, 느려 터진 행정은 물론, 쯔쯔가무시 따위 덤비라는 듯 풀밭에 벌러덩 누워 볕을 쬐는 사람들이나 구리색, 하얀색 피부, 파란 눈, 금발, 곱슬머리의 다채로운 머리통이 북적이는 찻간까지. 이젠 그냥저냥 익숙해진 풍경들이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외국인에게 다름이란 숙명이다. 그 숙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방식은 간단하다. 모든 물음표를 제거하고 통째로 꿀꺽 삼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를 다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미처 제거되지 못한 <왜?>가 생선 가시처럼 컥컥 걸릴 때도 많다. 왜 신발을 신고 집안에 (카펫 바닥인데!) 들어가는지, 비가 오는데 왜 우산을 쓰지 않는지, 왜 더러운 지하철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는지, 무인 기계가 서너 대씩 있는데도 왜 사람이 있는 창구에 길게 (굳이!?) 줄을 서는지, 이 디지털 시대에 편지를 써야 하는 행정일이 왜 이리도 많은지, 저녁을 이렇게 늦게 게다가 오래 먹으면 잠은 도대체 몇 시에 자는지 (아아니 뱃속에 음식이 그득한데 잠을 잘 수가 있나?). 이 어리둥절한 관습들(?)의 이유를 따져 묻는 건 바보 같은 짓이기에 껄끄러운 이물감을 누르며 일단 삼키고 보는 것이다.


다름에도 미덕은 있다. 익숙한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는 점이다. 이곳에 살며 가장 놀랐던 것은 걸인들의 태도였다. 이 나라에는 파워 당당하게 구걸하는 걸인이 많고 행인들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술이나 약에 취한 위협적인 걸인도 있겠지만, 대부분 인사를 건네며 베풂을 청하고, 동전을 내미는 사람이 있으면 고맙다고 인사한다. 아마도 이 당당함의 기저에는 "당신은 운이 좋아 더 많은 기회를 갖고 태어났으니, 기회가 적었던 나에게 동전 한 푼 나누어 줄 수 있지 않느냐"는 정당한 청유가 깔려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추위나 더위를 견디고, 행인의 시선을 견디고, 지하철과 길거리에서 발품을 팔아 자비와 나눔을 구하는 일을 '노동'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젠더와 관련해서도 신선했던 경험이 있다. 일터에서 "Madame X와 그의 남편(son époux)/Monsieur X와 그의 아내(son épouse)"를 문구로 넣은 부부동반 초청장을 보낸 적이 있다. 초청장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오스트리아 여성 인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배우자는 여성이니 'époux(남편, 남성 배우자)'를 'épouse(아내, 여성 배우자)'로 바꾸어 초청장을 다시 보내달라고 했다. 너무도 당연하게 '이성애'와 '결혼'을 전제로 한 채 일괄적으로 나가던 초청장에 늘 물음표를 가졌던 나이지만, 그것을 짚어내는 초청자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한국과 달리 프랑스가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국가란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 순간이다.


가끔은 접점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다름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이 땅에서 영원히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을 본다. 예컨대 그런 순간들, 7월 14일 행인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으며 육중한 탱크 행렬이 시내를 점령하고 도로를 달렸던 날. 혁명의 승리가 주는 기쁨보다 저 거대하고 무자비한 탱크 바퀴가 두 여중생의 여린 몸을 짓이겼던 기억이 먼저 내게 달려들 때, 그래서 환희에 찬 사람들에 섞여 함성을 지르지 못했을 때, 나는 나의 세계와 이 세계의 지극한 거리를 느낀다. 겨우 열여섯이었던 내게 끔찍한 현장 사진이 남긴 공포와 참담한 기억이 여기 축배를 든 군중들에겐 없다. 완전히 다른 삶의 맥락 위에서 살아왔다는 것, 이 세계와 내가 공유하는 역사적 사회적 기억이 없다는 것. 거기에서 우리의 다름이 얼마나 깊은가 생각한다. 피부색이나 눈동자 색이 다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너무도 광막하고 가마득한 간극.


아침에 일어나 해가 저무는 이 순간까지도 적지 않은 다름을 삼켰다. 밖에서 신던 운동화를 그대로 신고 실내피트니스에 들어가지만, 운동 후에는 소독액으로 기구를 닦아야 하는 아리송한 위생관념. 엘리베이터에서 내게 인사를 건네고, 출입문을 잡아주니 (당연하게!) 고맙다고 말하는 낯선 사람들. 분실된 소포가 되돌아왔다는 J가 전해온 비보 (아아니 이 나라는 우편 분실이 뭐 이렇게 잦은지. 쓰다 보니 또 빡...). 불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낯섦과 기분 좋은 다름이 물결처럼 상쇄되며 또 하루가 굴러간다. 나는 익숙하게 물음표를 지우고 몸에 힘을 뺀 채 이 다름의 파도에 몸을 맡긴다. 넘실넘실. 이런 게 외노자 생활의 참재미가 아닌가 생각하며.

작가의 이전글 #14. 미식의 기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