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콜콜한 소회
마다가스카르에 온지 1,500일이 되었다. 이렇게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느새 4년을 꽉 채우고,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솔직히 나도 내가 이런 험지에서 살 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 했다.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직장에 이력서를 쓰고, 온라인 면접을 볼 때만 해도 1년을 채 못 버틸 줄 알았다. 그래서 서울 자취방의 짐을 다 빼지도 않은 채 마다가스카르행 비행기에 올랐었다. 그리고 1년 뒤 서울 자취방의 전세 계약이 끝나갈 무렵, 남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연차를 내고 서울에 다녀와야 했다.
나는 잘 살고 있다. 여전히, 마다가스카르에서. 강도나 살인같은 흉흉한 사건 사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운 좋게도 나나 내 주변에 닥친 적은 없었다. 반복된 일상이었다. 평일에 회사에 나갔고, 주말엔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덕질을 하며 쉬었다. 회사 생활은 늘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어떤 일들은 마음처럼 풀리지 않았고, 때로는 환멸나는 인간들을 견뎌야 했으며, 나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래봤자 모두 찻잔 속 폭풍이었지만 말이다. 마음이 많이 지칠 때면 인근 모리셔스나 태국으로 훌쩍 휴양을 떠났다.
회사에서도 5년차가 되어, 연차가 하루 늘었다. 그 동안 들고 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서가 다른 네 명의 동료가 퇴사했고, 귀임을 맞은 나의 상사들도 저마다의 차례로 하나둘 돌아갔다. 나는 남겨진 사람으로서 여러 번 정든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늘 내 차례는 언제일까 생각했지만, 아직도 내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프리카 쌩초짜였던 나는 어엿한 고인물이 되어, 아프리카 신입들의 믿는 구석이 되어가고 있다.
마다가스카르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지난 해 쿠데타로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이 다이나믹한 역사의 현장을 내내 집에서 은신하며 지켜보았다. 익숙한 가게들이 반정부 시위대의 약탈과 방화로 쑥대밭이 되었다. 한동안 물과 기초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상점 앞에 긴 줄을 서야 했다. 그마저도 패닉 바잉으로 매대는 텅텅 비어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를 확인하며, 공항이 폐쇄되면 사방이 물인 이 섬나라에서 도무지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몸도 마음도 많이 변한 것을 느낀다. 가장 큰 몸의 변화는 추운 것을 참지 못 하게 된 것이다. 연중 온화한 기후 탓에 체감상 추위를 견디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지만, 물리적으로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찬 바람과 찬물에 닿으면 발진이 일고 가려워지는 알러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진찰을 받아봤지만, 원인은 찾지 못 했다. 눈이 펑펑 오는 나라에 사는 꿈을 자주 꿨었는데. 이제는 정말로 추운 나라에서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마음의 변화라면, 더 이상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늘 해외에 있을 때면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빚처럼 남아 있었다. 이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특별히 이곳에 정착해야겠다 마음 먹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다음 여정이 꼭 한국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떠나온 곳을 지워버리니, 방향도 좌표도 없는 막막한 미래만 남는 느낌이다. 앞으로의 선택지가 상상가능한 영역을 벗어난 것 같아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미리 걱정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우기의 끝자락, 열린 창밖으로 밤벌레들이 운다. 한밤에 소나기가 쏟아지려는지 먼 곳에서 낮은 천둥 소리가 울려온다.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마다가스카르의 밤이다. 이렇게 고요하고 깨끗한 밤을 맞을 때, 더할 나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권의 집, 좋은 차, 단란한 가정, 안정된 직장, 상상가능한 구체적인 미래 같은 게 내게 없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는 이런 것들이 내게 평안과 안녕을 줄 것이라 믿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래서 늘 조급하고 불안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1,500번의 더할 나위 없는 밤을 보내며, 사실은 내가 찾던 진짜 평안과 안녕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이 가난하고 불편한 나라를 떠나지 못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1,501번째 아침을 기다리며, 덥지도 춥지도 않은 이 온화한 시간 속에 조금 더 머물러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