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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May 04. 2020

#43. 2018년의 독서

2018년 12월 31일의 기록

*책을 보내  친구들에게 보여주려고 시작했다 결국 끝내지 못한 기록이다. 이대로 서랍 속에   같아 그냥 올려버린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누구나 한 번쯤 겪게 되는 비극과 부조리를 압축해서 허구의 인물인 김지영의 인생에 풀어놓았다. 남초 사이트에서 어떤 여자 아이돌이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메갈', '남성들의 적'으로 낙인찍히면서 언어폭력은 물론 보이콧까지 당했다고 들었다. 책을 읽거나 혹은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 욕설과 공격을 당해야 한다는 게 정상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이 남성 혐오를 조장하거나, 남성을 적으로 치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절규나 호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당연하게 가해지는 억압과 부조리가 있다고, 이건 잘못된 거라고, 들어보라고, 공감해달라고, 바꾸어 나가자고 소설의 형식을 빌어 말하는 것이 어째서 편 가르기나 혐오로 해석되는지 모르겠다. (밑도 끝도 없는 악플을 다는 일부 남성들은 대체 책을 읽긴 한 건가 싶다. 아님 책 한 권도 제대로 소화 못할 정도로 지능이 떨어지나;;) 더 많이 회자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문학동네, 2017)

H 언니가 보내 준 책이다. 볕이 좋았던 봄이었다. 한동안 회사 점심시간에 몽파르나스 묘지에서 도시락을 먹고 광합성을 했었는데, 그때 들고 다니며 읽었던 책이다. 연구실에서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한 종수는 짐을 싸면서 첫사랑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하고, 수영이 천착했던 '랄프 로렌은 왜 시계를 만들지 않았나?'의 해답을 찾기 위해 죽은 랄프 로렌의 행적을 좇는다. 종수는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채 맹목적으로 랄프 로렌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망가진 내면을 치유해 나간다. 실제 인물에 허구적 상상력을 입혀 정말 있음 직하게 썼다. '있음 직한' 느낌을 받는 이유는 랄프 로렌과 관련된 모든 단서와 사람들이 무척 디테일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디테일함에 홀려 성실하게 플롯을 따라갔지만, 누군가에게는 지루함을 주기도 하는 것 같다. 혈육에게 추천했는데 카톡으로 '이거 언제부터 재밌어지냐?'라고 묻길래 '자매님 그냥 그만두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무드입니다만..' 이라고 대답했다.


거울 너머 1 - 파생의 읽기/ 임소라 (하우위아, 2017)

J가 이 책을 보내며 덧붙인 코멘트는 "그냥 재밌어요 읽어봐요" 딱 한 마디였다. 늘 그렇듯 코멘트는 적중했고 정말 재밌게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필력이 다한 책이다. 독립출판물인 '거울 너머'시리즈의 세 번째 책으로 "작가가 내키는 대로 읽고 쓴 독후감"이다. 책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지만, 책으로부터 "파생"된 작가의 이야기가 주다. 왼쪽 페이지에 놓인 작가의 꾸밈없는 삶과 생각이 오른쪽 페이지에 놓인 책의 인용문과 만나 평행하는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한다. 솔직하고 위트 있는 작가의 이야기가 공감되기도 하고 응원하고 싶어 져서 아는 사람들에게 한동안 추천하고 다녔다. 독후감이라면서 책 이야기는 너무 없는 거 아니야? 할 수도 있지만, 작가가 다룬 책 중 '나중에 한국 가면 꼭 사 봐야지' 하고 제목을 따로 기록해둔 걸 보면 책에 관한 책인 것은 확실한 듯. 책으로부터 파생된 작가의 이야기가 내게서 또 다른 생각과 독서의 파생을 낳는, 제목 그대로 내게도 "파생의 읽기"로 남은 책.


거울 너머 2 - 비활성화/ 임소라 (하우위아, 2017)

거울 너머 1을 너무 재밌게 읽었다며 펭귄 박수를 치며 웃었더니 J가 즉시 두 번째 책 택배 속에 이 책을 넣어주었다. 역시 피드백이 확실한 (책) 스폰서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에서 발생할 법한 갈등과 사건을 진짜처럼 다뤘다. 작가는 책의 겉표지에 "허구의 인물이 겪는 가상의 곤경"으로 인해 결국 계정이 비활성화("관계의 차단")되는 상황을 그렸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이 설명이 없었다면 실화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일단 등장인물들이 너무나 '내 주변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다. 작가는 각각의 SNS의 주기능, 성격, 그늘을 예리하게 잡아채서, 익명, 광고, 펀딩, 도용, 염탐, 협박, 사기 등 '실제 같은' 상황 속에 인물들을 밀어 넣는다. 마지막에 등장인물과의 인터뷰가 담겨있는데, 모두 현실의 삶과 나름의 입장이 있는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라서 넷(net)이라는 가상세계에 현타가 온달까, SNS 도대체 몰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책이 입은 옷/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2017)

지금은 파리를 떠나 한국에서 마카롱 장인이 되었지만, 한때 나의 주말 속에는 언제나 S가 있었다. 사실 이 책은 책 내용보다 S와의 시간으로 기억되는 책이다. 날씨가 무척 화창했던 어느 일요일이었고, 우리는 도시락과 간식을 싸들고 튈르리 공원에서 만났다. 우리는 나뭇잎 차양이 드리운 곳에 자리를 잡고 선베드에 누워 오후 내내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책이 입은 옷>이다. 작가는 '책 표지'가 갖는 여러 가지 의미를 자신의 유년시절과 작가로서의 경험을 들어 솔직하고 재미있게 설명했다. 이 말하기 방식이 너무 좋아서 한국에 가면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꼭 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예리함도 놓치지 않는다. 출판 시장 속에서 표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저자와 디자이너와 독자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주는지 정확하게 분석한다. 펭귄북스 시리즈 같은 예쁜 책 표지 사진이 들어 있어서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책이기도!


서울에 사는 시인들 (시인동네, 2017)

O가 내 최애돌의 굿즈와 함께 보내준 책이다. 서울에 살고 있는 시인을 대상으로 그의 시 세계와 서울이라는 공간이 그에게 주는 의미를 담은 인터뷰집이다. 다 읽고 나서 책 마지막 장에 '비매품'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어 무료 배포되었다. 열두 명의 시인이 각각 여섯씩 짝을 이루어서 상대를 인터뷰했다. (유계영 시인의 질문에 나왔듯이) 시인의 "시"와 함께 "인"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무대 뒤편이나 영화의 비하인드처럼 평소 좋아하던 시인의 생활과 생각, 작법, 취향 같은 것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인터뷰를 읽고 시집을 꼭 찾아 읽어봐야지 하고 페이지를 접어놓기도 했다. 서울에 대한 각기 다른 시선에 귀 기울이며, 아련하게 서울이 그리워졌던 책이기도 하다. 송승언 시인의 인터뷰를 읽고 오랜만에 <철과 오크>를 꺼냈다가 코가 단단히 꿰여서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내내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 않아도 여자입니다/ 이진송 (프런티어, 2018)

비연애를 표방한 페미니즘 독립 잡지 <계간 홀로>의 편집장이 네 번째 단행본을 냈다. 고등학교 1학년인 "동생도 재미있게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힘 빼고 살랑살랑" 쓴 페미니즘 에세이다. 겉표지가 상큼 터지는 핑크색이고 제목도 아련한 폰트로 갬성 넘치게 쓰여있지만 그렇다고 호락호락한 책은 아니다. 이진송 작가 특유의 쩅한 여름 햇살 같은 에너지와 날 선 예리함으로 대중문화 속에 "여자라서 ~해야 한다"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강요와 검열을 활어회 뜨듯이 발라낸다. 단행본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 드립과 깨발랄한 유머는 덤. 여성 독자라면 자신을 옥죄던 속박을 찢어발길 힘을 얻고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남성 독자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에 물음표를 붙이게 되는 그런 책인 것 같다. 이게 왜 서점에서 화제의 책으로 언급되지 않는지 잘 모르겠다. 중고등학생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쉽게 잘 쓴 페미니즘 서적이라고 생각한다. 더 많이 팔렸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민음사, 2017)

"언니가 분명 좋아할 책"이라며 J가 장담한 확신의 픽이었다. 처음으로 읽는 최진영 소설이다. <거울 너머 1 - 파생의 읽기>에 실린 최진영 소설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의 일부 발췌를 읽고 한국에 가면 꼭 사봐야지 했었다. J의 예언은 적중했고 단숨에 몰입하여 후루룩 한나절 만에 읽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한 상황을 가정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폭력과 야만성으로 더욱 끔찍해지는 소설 속 상황이 너무도 있음 직해서 더 절망적인데, 극단적 재난 속에서 본성을 드러내는 인간(남성) 군상을 보는 게 고통스러웠다. 살아남기 위해 집단을 형성하고 죽이고 약탈하고 여성을 겁탈하고 아이는 사냥하고... 진심으로 없던 인류애도 사라지는 느낌이다. 반면, 이런 지옥도가 있기에 도리와 지나라는 두 여성의 사랑과 연대가 더욱 고귀하게 빛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노란책/ 타카노 후미코 (북스토리, 2018)

H 언니가 보내 준 아트코믹스 시리즈 중 하나. 타카노 후미코의 단편 만화 네 작품을 엮었다. 제목처럼 커버도 예쁜 노란색 하드커버로 되어있고 일본 서적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페이지를 넘기도록 편집되었다.  불행히도 이 책은 첫 에피소드인 '노란책 - 자크티보라는 이름의 친구'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다. 고등학생인 미치코가 <티보가의 사람들>이라는 책에 빠지는 모습을 그렸다. 독서를 통해 평범한 현실이 지워지고 새로운 우주가 펼쳐지는 경험을 너무너무 잘 묘사했다. 답답한 교실과 우글거리는 아이들 소음과 수행평가와 중간고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던 중고등학교의 독서 체험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뒤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칸과 칸 사이의 연결이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들어 집중이 힘들었다. 그리고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역시 일본 특유의 정서는 나와 맞지 않는 걸로.... (취향의 문제겠지만 솔직히 폰트가 진짜 읽기 싫게 생겼다 ㅜㅜ)

        

피프티피플/ 정세랑 (창비, 2016)

우리 주위에 있을 법한 51명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해 본 적 있을 것이다. 화면 속 주연 배우의 어깨너머로 흐릿하게 잡힌 사람들의 안부 같은 것 말이다. 작가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 혹은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퍼즐 같다. 세계라는 커다란 그림을 완성하는 '사람들'이란 퍼즐 조각들. 따로 흩어져있는 듯한 퍼즐 조각들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다. 내 주변 어디든 있을 것 같은 이름의 이 주인공들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의 이야기이도 하면서 너의 이야기이기도 한, 싱겁지만 소중하고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이야기들. 현상으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진짜 세계 들여다본 기분이 든다. 긴 여운이 남는 책.


선의 법칙/ 편혜영 (문학동네, 2015)

K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읽은 편혜영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읽은 작품이 2012년 잠깐 신림에 살 때 책고을에서 빌린 <저녁의 구애>였다. 고향 같은 이대 앞을 떠나 신림으로 옮겨 갔던 그때가 내 20대의 가장 어둡고 암울한 시기였다. 그때 저 <저녁의 구애>는 우울로 활활 불타던 일상에 던져진 부탄가스... 였달까. 저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갔었다 (물론 책 때문은 아니었다). 괴기스럽거나 음산하거나 음울한 것 중 뭐든 하나는 나올 거라는 각오(?)를 하고 책장을 폈는데 생각보다 따듯(!)했다. 신기정과 윤세오. 전혀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삶의 평행선 위를 살던 두 주인공은 가족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변곡점을 맞는다. 일상의 좌표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 죽음의 시작을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삶이란 무엇일까, 어떤 힘이 무슨 방향으로 나를 이끌며, 어떤 선을 그리고 있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책.            


현남오빠에게/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다산책방, 2017)

페미니즘 단편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일곱 작가의 개성이 무지개처럼 빛나는데, 복잡다단한 페미니즘의 여러 단면을 각기 다른 시각과 방식으로 보여준다. 첫 소설이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현남오빠에게>는 무슨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인가 싶었다. 내게도 강현 남 같은 구남친이 있었다. 불행히도 그는 강현 남인 데다가 폭력 성향까지(소설보다 빡센 현실^^) 골고루 갖추셔서 내게 '안전 이별'이라는 트라우마를 남긴 개새끼였다. 만일 그가 살아있다면(하도 죽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빌어서 혹시나...) 우연이라도 이 책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는 하지 못한 나의 고백이 될 테니까. 언젠가 며느리, 아내, 시누이, 엄마, 중년의 혹은 장년의 여성이 될지도 모르는 내게 <당신의 평화>, <경년>, <화성의 아이> 역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였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가 남기는 은유적 메시지나 한 편의 영화 같은 <이방인>,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의 짜릿함은 읽는 내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준다.


모든 시도는 따뜻할 수밖에/ 이내 (이후진 프레스, 2018)

참 좋았던 책. 이 책은 '우연'과 '인연'을 믿고 떠난, 음악가 이내의 노래 여행기이자 대안적 형태의 도시 생존기다. 올해 읽었던 책 중 가장 많은 문장을 채집해서 일기장에 옮긴 것 같다. 예쁜 문장이 주는 즐거움보다도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해답이 있어서였다. "무용한 것에 마음을 쓰는 고귀한" 사람, "시간이 돈으로 환원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시간을 돈으로만 돌려받고 싶지 않은" 사람, "작은 선택으로 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사람, "빠르게 변하는 냉정한 세상이어도 자신만의 온도를 유지하며 유유히 흐르는" 사람, 동네 사람들과 "서로의 빈틈과 부족함을 자연스레 채우며 함께 만족하는" 사람, "폐 끼치는 용기"를 가진 사람, "한 사람이 우주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렇게 작은 것들"의 가능성을 아는 사람, 공동체와 연대의 힘을 믿는 사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만덕 시위 현장에서 노래했던 그녀는 “내 노래는 쉽게 빼앗기고 마는 작은 시간과 기억에 관한 것”이어서 “힘이 빠지고 부끄러웠다”라고 고백했다. 이내는 자기 글과 노래가 파리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곳의 누군가에게 "가능한 미래"라는 작은 희망을 품게 했다면 믿을까? 그 "작고 사소한 노래"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알려주고 싶다. 음악가 이내가 오래오래 노래하고 글 써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수많은 따뜻한 시도가 모여 차가운 세상의 온도를 바꿀 수 있을 때까지.


질문있습니다/ 김현 (서랍의 날씨, 2018)

작년에 <걱정 말고 따라와>를 읽고 더요! 더요! 외치고 싶었는데 감사하게도 책이 또 나왔다. 여름에 잠깐 한국에 들어갔을 때 내가 나에게 주는 책 선물을 부친 적이 있다. 오랜만에 서점에 가서 내 취향으로 책을 고르고, 책 택배를 싸고, 파리에 있는 아파트로 보냈다. 파리로 먼저 돌아와 택배를 기다리는 시간이 참 설레고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내 손으로 골랐던 책 중 하나다.  <질문있습니다>는 시인이자 페미라이터인 김현의 산문집이다. 2년 전 문단 내 미투 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던 동명의 글 '질문 있습니다'가 실려 있다. 남성들 사이에서 대리 여성으로 취급당하며 느꼈던 수치심을 고백하고, 문단에서 목격한 여성 혐오와 위계 폭력을 고발한 그는 젠더에 관한 인식과 윤리가 부재하는 한국 문단과 한국 사회를 투명한 눈동자로 직시하고 얼음장처럼 규탄한다. 차별과 혐오에 맞서고, 그늘진 곳을 바라보고, 사색하고, 읽고, 질문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연인을, 동료를,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의 강인한 글이다. 읽는 이의 세계를 흔들어 놓는 힘센 글.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맨 첫 장의 '들어가며'의 의미를 알게 된다. "쓰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쓰고 난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다. 쓰는 자리에 읽는 것을 넣어도 마찬가지다. 쓰고 읽는 자리에 질문하기를 넣어 볼 수도 있겠다. 지금부터 우리는 대답에 속할 수 있다."    


딸에 대하여/ 김혜진 (민음사, 2017)

책이든 영화든 노래 가사든 나는 부모님을 소재로 한 내용을 싫어한다. '치트키를 쓰다니 비겁하군'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내 약점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절대로 안 울 거야, 내가 지나 봐라, 하고 이를 꽉 물고 맞서지만 결국 눈물 콧물을 줄줄 쏟고 있는 내가 있다. <딸에 대하여>는 엄마가 화자이지만 모성신화에 일조하고 눈물 버튼을 공략하는 신파가 아니다. 이 책은 너를 향한 "포기하지 않는 어떤 마음"에 대한 이야기다. 다 커버린 딸은 엄마와 다르다. 엄마는 딸이 레즈비언인 것이, 동성 연인 그린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대학 강사의 부당해고 시위 현장에 몸을 내던지는 것이, 자꾸만 세계와 불화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엄마와 딸은 같다. 요양사인 엄마는 아무런 돈이 되지 않는 무연고자 젠을 비인간적으로 '처분'하려는 요양원에 저항하다가 결국 젠을 집으로 데려온다. 끝내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고 일자리를 잃는다. 차별당하는 딸을 위해 시위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난폭하고 고단한 세상 속에서 서로를 수없이 밀었다가 당기고, 할퀴다가 끌어안는 두 사람. 젠과 그린이 휘젓는 풍경 속에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그리고 한 지붕 아래의 엄마, 딸, 그린, 젠이 한 명의 '여성'으로 보이는 이상한 경험.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문학동네, 2018)

작년에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인상 깊게 읽었었다. 수채풍의 분홍 표지만큼 맑고 순연한 여자들의 이야기로 가득했었다. 침대 맡에서 마지막 단편 ‘비밀’을 읽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은은한 노란 표지 입은 이번 소설은 채 여물지 않은 순한 몸과 여린 감정을 가진 시절을 다루었다. 친구, 연인, 고모와 조카, 자매… 다양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들, 불가피한 어긋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늘 선량하고픈 개인이지만, 모두에게 무해할 수만은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이기 때문에, 엄마와 언니가 있고, 여중, 여고, 여대, 여자대학원을 다니며 늘 여성 공동체에 머물렀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게 공감했던 것 같다. 같은 여성이라도 각기 다른 개인적, 사회적 맥락과 권력관계 속에서 늘 연대할 수만은 없는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책장을 덮으며 유년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는데, 내 손으로 짓고 무너뜨린 수많은 관계들을 생각했다. 유리처럼 맑고, 그래서 더 위태로웠던 시절, 왜 관계는 수학이 아닐까? 예측할 수 없는 화학반응처럼 오해와 상처를 도출할까? 괴로웠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독서의 여운이 길었다. 회사 동료들에게 추천하며 널리 빌려주기도 했던 책.


경애의 마음/ 김금희 (창비, 2018)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읽었다. 어렵거나 복잡한 플롯이 아닌데도 그랬다. 아마 마음을 다해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질서가 아닌, 자신만의 “마음의 질서"를 지키는 상수와 경애는 반도 미싱에서 좌천에 가까운 인사이동을 당해 한 팀이 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둘은 회사의 눈엣가시라는 면 말고도 더욱 깊은 인연으로 얽혀있음이 밝혀지는데, 두 사람은 같은 상실의 기억을 공유하고, 온라인으로 내밀한 마음의 위로를 나눈 적이 있다. 경애와 상수는 베트남으로 파견을 가게 되면서 조력자가 되고,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면서 아주 천천히 사랑을 느끼게 된다. 따뜻하고 무해한 드라마를 한 편 본 것 같았다. 무엇보다 경애와 상수가 꼭 어딘가 진짜 살아있는 사람처럼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삶과 사람과 서로를 경애(敬愛)하는 마음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절대로 파괴되지 않은” 그 마음이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는 장면들을 떠올리면, 그 온기와 힘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다.


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김남주역, 2001)

나는 이북(e-book)에 무척 보수적인 편이었다. 화면으로 읽는 독서는 어쩐지 낯설고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모국어로 하는 독서는 친구들이 가끔 보내주는 책 택배에 의존해야 했는데, 당연히 책의 선택권은 내게 없었다. 올해는 좀 능동적으로 독서를 하고 싶어서 큰 맘먹고 리디북스 앱을 깔았다. 리디북스에서 고르고 결제한 첫 책이 열린책들의 ‘아멜리 노통브 전집’이다.  <오후 네 시>는 이북으로 읽은 첫 책이다. 퇴임 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 위해 깡시골로 내려운 에밀과 쥘리에트 부부에게 매일 오후 네 시 베르나르댕이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서 벌어지는 기괴한 코미디다. 친절과 선의 - 의문과 호기심 - 불쾌함과 분노 -  공포로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점점 뒤틀려가는 주인공의 내면의 흐름을 보게 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유년기에 아내를 만나 순수한 사랑을 이루고 평생을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사였던" 에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강렬한 연극을 한 편 본 듯 (핸드폰의 작은 액정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후루룩 읽었다.

     

배고픔의 자서전/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전미연 역, 2006)

<배고픔의 자서전>은 징글징글하게 덥던 한여름에 공원에 누워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외교관 아버지를 따라 다양한 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스펙터클한 노통브의 유년기를 관통하는 ‘배고픔’의 정체는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욕구다. 음식, 지식, 독서, 글, 우정, 사랑, 아름다움… 이 모든 것을 향한 뜨거운 갈망이 한 소녀의 생을 충동하고 움직이며 성장시킨다. 혼자 히죽거리며 참 재밌게 읽었는데, 발랄 과 도발을 넘나드는 특유의 위트 넘치는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정말 정말 잘 살린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소녀였던 화자 노통브의 목소리를 쫄깃 쫀쫀하게 잘 구현했다. 이후로도 다른 노통브 책을 더 읽었지만 이만큼 화자에 뻔뻔하게 (극찬) 빙의된 번역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전미연 번역서 덕질을 시작했다는 건 안물안궁의 tmi… (리디북스에서 모든 역서를 사들였다. 덕질 후기는 언젠가…)


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전미연역, 2002)

<두려움과 떨림>은 벨기에인인 작가가 한 일본의 대기업에서 일한 경험을 담은 자전적 이야기다. 집단주의, 폐쇄성, 보수주의, 주종에 가까운 위계질서, 비상식과 비인간성으로 범벅된 일본의 시스템을 천진하고 깨발랄한 문체로 뼈를 때리며 풍자한다. 동북아 종특인지 일본과 (결은 다르지만) 비슷한 조직 문화를 갖는 한국 기업도 제 발 저릴 내용이지 않나 싶다. 일본 천왕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하듯이, 우리도 직급과 서열에 따라 굽신거리고, 상관(갑)의 지시는 무조건 이행해야 하니까. '다른' 것은 배척하는 집단의 보수성도 일본에 결코 지지 않는다. 노통브는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모멸에 가까운 취급을 당하지만 소설은 결코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다. 화자의 태연자약하고 명랑한 목소리 덕분에 오히려 많이 웃었다. 역시나 화자 노통브에 감쪽같이 밀착한 매끄럽고 찰진 번역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응원봉을 흔들며 환호).


머큐리/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이상해역, 2005)

노통브식 <미녀와 야수>라는 소개글을 먼저 접하고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이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는 약간의 배신감에 휩싸였는데, 아마도 저 마케팅 문구를 읽고 디즈니를 상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녀가 야수의 추한 겉모습이 아닌, 아름다운 내면을 보고 진정한 사랑에 빠지고, 그 덕에 마법이 풀린 야수는 다시 미남으로 돌아와(!) 선남선녀 커플이 성사되는 (아니, 쓰다 보니 이거 순 모순이잖아?!) 그런 동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책에는 광기에 가까운 탐미주의로 가득한데, (아, 탐미주의라는 맥락에서 <미녀와 야수>와 일맥상통하다는 건가?!) 늙은 선장 랑쿠르가 아리따운 소녀 하젤을 거짓으로 섬에 가둬둔 채 살던 중, 우연히 왕진 온 간호사 프랑수아즈가 소녀의 아름다움에 홀려 그녀를 구출하거나(결말 1), 선장과 같은 방식으로 욕망하게 된다는(결말 2) 이야기다. 읽다 보면 작가 자신이 아름다움에 미쳐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집요하게 그려진다. 하젤과 프랑수아즈 사이의 동성애 코드가 은근 짜릿하고, 책을 통해 구원(탈출)을 찾으려 한다든지, 머큐리(수은 + 전령의 신이자 의학의 상징)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는 등 은유와 지적 유희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다만, 소아성애자에 윤리나 양심이라곤 1도 없는 추악한 늙은이를 쏴 죽이고 싶어 진다는 점, 가스라이팅에 뇌가 절여진 하젤이 복장 터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은 각오해야 한다.


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열린책들, 이상해역, 2014)

일이 없던 오후에 사무실에서 핸드폰 액정으로 읽었다. <푸른 수염>이라는 프랑스 동화를 알게 된 건 학부 때였다. 하성란의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라는 소설을 읽으며 알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결혼과 동성애를 대입한 한국형 푸른 수염이었다. 노통브는 기괴한 스릴러 로맨스로 동화를 변주했다. 주인공 사르튀닌은 파리에 사는 벨기에 여자다. 가난한 비정규직 교사이지만 똑똑하고 야무진 여성으로, 에스파냐 귀족 돈 올레미리오의 호화로운 집에서 헐값에 세 들어 산다. 그곳에서 여덟 명의 여성이 실종되었다. 한 지붕 아래, 돈 올레미오와 사르튀닌은 불꽃같은 티키타카로 서로를 밀고 당기다가 사랑에 빠진다. 푸른 수염의 아홉 번째 연인이 된 그녀는 자본이라는 권력을 쥔 지적 변태 푸른 수염에게 당당히 맞서고, 사라진 여자들의 비밀을 밝힌다. 팽팽한 배틀 로맨스와 스릴러의 줄타기가 돋보이는데, 사르튀닌이 넘나 당차고 멋있어서(걸크...) 내내 사이다를 들이켜는 기분이었다. (잔혹)동화적 결말까지 완벽했다. 재기 발랄한 와중에 지적이고 철학적인 여운도 놓치지 않는다. 사랑에 관한 믿음, 광기, 집착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


아버지 죽이기/ 아멜리 노통브 (열린책들, 최정수역, 2012)

역시 사무실에서 업무 중에 몰래 읽었던 책. 꽤 몰입해서 읽다가 마지막에 반전 때문에 벙 쪘던 기억이 난다. 소설은 아버지의 부재를 겪었던 소년 조가 양아버지 노먼을 만나면서 어떻게 아버지를 죽이고(뛰어넘고) 성인이 되어 가는지를 그린다. 노먼의 애인인 크리스티나를 흠모하면서 빼앗으려 하고, 마술사였던 노먼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후 라스베이거스라는 더 큰 물(?)에서 딜러가 되지만, 그곳에서 사기도박으로 노먼의 명예를 실추시켜 또 한 번 무너뜨리려 한다. 소설은 이렇게 철저하게 아버지를 죽이려(이기려)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을 성실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통브는 결말에 이르러 반전으로 대차게 이론의 뒤통수를 때린다. 또 신선했던 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아들'의 시점이 아니라, 반대편의 '아버지'의 시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점..? (엄마-딸의 관계에 비해) 평소에 잘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들-아버지의 관계의 특별함에 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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