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나무 Apr 07. 2020

#42. 2017년의 독서

2017년 12월 24일의 기록

*2017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썼던 글. 서랍 정리를 위해 올려본다. 


올해는 흔치 않게 활자가 풍요로운 한 해를 보냈다. 아무리 책을 드럽게 안 읽는 사람이라도 해외에 있다 보면 한글로 된 인쇄물이 그리워지기 마련인데 그 갈증을 해소하기란 녹록지 않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장바구니를 채우는 일은 쉽지만, 정확히 책값만큼 해외배송비가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 결제 버튼을 흔쾌히 누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정이 이러하기에 한국에서 누군가가 여행을 온다고 할 때면 거의 "올 때 메로나" 수준으로 "시집을 사서 비행기에서 읽은 후 우리 집에 버리고 가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가격과 무게면에서 부담 안 가기로는 시집이 최고다). 올해는 운 좋게도 여기저기서 물어다 주는 한국 책들을 제비 새끼처럼 신나게 받아먹었다. 특히 가을에 우리 집에서 머물다간 J가 시집과 각종 에세이, 본인이 만드는 잡지까지 한 무더기를 산타처럼 안기고 갔는데, J가 떠난 후 (특히 최애 덕질이 시들해질 즈음) 마음의 허기를 달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올해 읽은 것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봄에 읽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와 가을에 읽은 김현의 <걱정 말고 다녀와 - 켄 로치에게(dear my Ken Loach)>이다. 의도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둘 다 수필이고 영화와 관련된 책이 되었다. 두 책 모두 문장이 참 좋았고 시선이 아름다워 꼭꼭 씹어 읽었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는 책상 앞에 두고 자주 읽었다. 몇몇 문장을 채집해 일기장에 옮겨놓기도 하였다. 김혜리 기자는 서늘한 눈빛으로 영화를 읽고, 메시지를 촉촉하게 전달할 줄 아는 참 진기 방기한 사람인 것 같다 (야광봉을 흔든다). 냉철하고 신선한 서술 속에 인물을 향한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 예컨대, 연약하지만 용기 있는 주인공을 향한 응원, "무관한 사람에게 권력을 주지 않는 법을 아는" 의젓한 인물을 향한 기특함 같은. <늑대아이>에 대한 글은 (p.240) "너에게"라는 녹아내릴 것 같은 따스함으로 시작하는 편지 형식으로 쓰였는데, 한국에 있는 O와 통화하며 "이 영화를 이렇게 다감하게 읽어주는 작가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같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다룬 짧은 글에서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아 마지막 문단을 옮겨본다 : "마코토가 사고를 당하고 살아남았던 건널목은 기실 유년의 상징적 죽음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그려진 잔인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보편적 '비극'은 뜻밖의 위로도 선사한다. 인생은 미래의 어딘가에서 반드시 나를 기다릴 안온한 품을 향해 무릎이 깨져도 달려가는 것이다. 또는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을 누군가를 건강한 모습으로 기다리는 일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그렇게 건널목에 아직 다다르지 않은 젊은이와 그곳을 지나온 더 이상 젊지 않은 이들을 격려한다" (p.164).    


김현의 <걱정 말고 다녀와 - 켄 로치에게(dear my Ken Loach)>는 켄 로치와 그의 영화들처럼 연대하고 저항하고 사랑하는 삶에 대해 쓴 책이다. 작가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이 책에서 읽게 될 글들은 그러니까 그런 단순한 마음으로 쓴 것들이다. 배고픈 마음가짐으로 쓴 글. (...) 그리고 켄 로치와 그의 친구들이 보내온 마음가짐을 생각하면서(p.8)." 가난, 주거문제, 문단 내 성폭력, 동성애, 여성문제, 촛불집회, 세월호 등 우리의 삶을 쓸고 지나간 사회적인 이슈와 공동체적 삶에 대해 애쓰지 않고 악다구니 쓰지 않는 순하고 투명한 문장들로 이야기한다. 이 책이 좋은 이유는 다정함과 슬픔과 맞잡은 두 손의 온기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으로 그저 용기 있는 사람들의 곁에 서서" "사랑하는 얼굴, 저항하는 얼굴, 혁명하는 얼굴, 선언하는 얼굴"로 가난과 편견과 차별과 혐오를 이기려는 그의 선한 몸짓에 빛나는 희망을 넘치게 보내고 싶다.


두 책 이외에도 인상적이었던 올해의 독서 경험이라면, 평가절하되었던 전혜린을 재조명하고 멸칭으로서의 '소녀(문학소녀, 소녀 취향)'를 들여다보는 김용언의 <문학소녀>를 읽은 후, 한인 사이트에서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우연히!) 발견해 사서 읽었던 것(번역가 전혜린의 번역 방식과 그의 "감식안과 기획력"에 주목하게 되었다), 어릴 적 접한 도서, 영화, 드라마 그리고 각종 경험을 어른이 된 후 '여성'의 시각으로 되짚어보는 이다혜의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를 읽고서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을 보게 되었는데 책의 영향인지 더욱 기민한 감각으로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두 책 모두 사랑스러운 K가 보내주었다).


몇 권의 소설 신작들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크게 감동을 받았던 작품은 없었다. 그래도 김애란의 <바깥의 여름>은 적지 않은 문장을 채집해 일기장에 옮겼는데, 수록 작품 중 '건너편'이라는 소설은 당시의 내 연애 상황과 꼭 들어맞아 (그러니까 감정에 취해) 책장 한 귀퉁이를 접어놓았다. 와중에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참 좋았다. 담담하고 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복! 그리고 투명하게 젖어드는 슬픔도.  


좋았던 몇 권의 시집을 꼽는다면 먼저 이제니의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내내 '흐르는 낱말이 만드는 음악'을 읽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꺼내 읽을 때마다 "말할 수 없이 슬프고 좋은 기분"이 든다. 유형진의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도 참 좋았다. 어느 시집의 서문에 적힌 "어린이에게 동화가 필요하듯 어른에게는 시가 필요하다"는 문구가 생각났다. 환상인 듯 현실의 우화인 듯 회사 사무실에 앉아 "젖과 꿀이 더러운 기름과 산성비와 함께 흘러넘치는" "허니 밀크랜드"에서 "피터 판과 친구들"을 만난 일은 즐겁고도 의미심장한 경험이었다. 손미의 <양파 공동체>는 좋다 못해 어떻게 이런 시를 쓸까, 좀 충격적이었는데 아름답고 기이한(두려운) 시로 가득하다. 권혁웅 시인이 쓴 해설을 꼼꼼하게 읽고 거꾸로 다시 읽어나갔다. "불온함"과 설명할 수 없는 관능으로 센 여운을 남겼던 임승유의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나 나를 길들이는 일상으로부터 탈주하는 쾌감을 준 유계영의 <온갖 것들의 낮>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한 해가 벌써 다 가버린 기분이다. 2017년의 크리스마스이브는 내 작은 책장 앞에서 오래 서성였던 날로 기억하겠다. 담요를 뒤집어쓴 채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으며 타닥타닥 독서 경험을 기록했던 밤. 새삼 감사하다. 덕분에 남의 말을 빌려 사는 생활이 서럽고 이국의 언어가 나를 자꾸만 소외시킬 때 외롭지 않았다. 내게 어미새처럼 책을 물어다 준 고마운 이들에게 반짝이는 트리의 마음을 보낸다. 부디 달고 보드라운 꿈 속이기를.

작가의 이전글 #41. 따스한 몸의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