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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pr 06. 2020

#41. 따스한 몸의 기억

너를 쓰다듬고 안을 때 전해지는  

나는 A를 몸으로 기억한다. 그 애를 어학원 바깥에서 처음 만난 날, 내가 놀랐던 건 그 애의 몸 때문이었다. 언뜻 작고 말라 보였던 그 애의 몸은 가까이서 보니 크고 다부졌다. 잘 그을린 브라운색 피부에서 그 애가 자라 온 나라의 쨍한 햇살이 느껴졌고, 몸 구석구석에 숨겨진 타투 속에 그 애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언젠가 그 애의 꿈틀거리는 넓은 등을 바라보며 '몸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 애의 몸이 움직이는 게 좋았다. 몸짓 속에 그 애만의 리듬이 있었다. 나를 향해 걸어올 때, 내 허리를 감싸며 볼키스할 때, 나를 안고 춤출 때, 파자마 바지를 걸치고 오믈렛을 만들 때, 얼음 든 술잔을 건넬 때, 담배에 불을 붙일 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떤 여유가 깃든 근사한 리듬이었다.  


그 애가 떠나버린 지금, 수많은 그 애의 조각들이 세탁기처럼 내 일상 속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무엇보다 몸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애의 목에 팔을 걸 때 손에 닿는 뒷목, 품 속에 내 허리를 단단하게 가두던 팔, 손바닥 위로 까끌하게 닿는 까맣고 짧은 머리카락, 내 무릎의 흉터를 쓰다듬던 손가락, 살결 위로 거칠게 스치는 수염, 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톡톡 말려주던 손길, 내 몸을 꽉 쥐던 악력 같은 것들. 뜨겁고, 순수하고, 다감하고, 충만한 몸의 기억들. 관계에 관한 한, 나는 몸으로 기억하는 것들이 참 많다. 새벽 기도회에서 돌아와 내 이불속에 들어온 엄마의 차가운 발이라든지, 내 팔목을 붙들던 옛 애인이 축축한 손이라든지, 생일 아침 나를 안아 준 넉넉한 미미의 품 속이라든지, 아이처럼 내 품에 파고들던 Y의 체온과 내 얼굴을 간지럽히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처럼 말이다. 슬프고, 따뜻하고, 설레고... 참 다양한 이유로 오래 잊히지 않는 감각들이다.


그런 이유로 내게 몸이 맞닿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누군가를 쓰다듬고 안을 때만 전해지는 '어떤 것'을 무척 사랑한다. 실은 아직도 그 '어떤 것'에 해당하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절대로 숨기거나 포장할 수 없는, 몸에서 몸으로 전해지는 순전한 마음 같은 것. 내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고 마는, 아주 내밀하고 다정한 파장이기도 하다. 그 '어떤 것'의 존재를 처음으로 의식한 것도 이곳, 몬트리올에서였다. 어학원에서 만났던 H가 그것을 알려주었다. H는 학원에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회화 수업에서 만난 우리는 수업 없는 오후나 주말에 도시의 이곳저곳을 함께 돌아다니곤 했다. 나는 H를 참 좋아했다. 세상을 보는 눈, 관계에 임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 나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H는 쉽게 곁을 내어주는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맑고 강직했다. 그리고 언제나 내게 진실했다.


어학원의 일상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어느 평범한 날이었다. 도시락을 데우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H가 다가왔다.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H에게 "안아줘요. 나 온기가 필요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넓게 벌린 H의 팔 속으로 몸을 기댔다. 처음엔 장난처럼 안길 작정이었는데, 문득 H가 나를 꽉 부둥켜안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온전하게 H의 품 속에 안겼던 것 같다. 어느새 우리는 웃음을 지우고 말없이 그렇게 안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H의 몸에서 내 몸으로 전해지던 ‘어떤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위안, 진심, 염려, 이해, 사랑... 세상의 온갖 정다운 단어로 꽉 찬 감정이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던, 깊고 오래된 내 결핍이 순식간에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무릎 아래가 사라질 것 같은, 그 자리에서 저항 없이 녹아 버리고 싶은, 너무 다정해서 엉엉 울고 싶어 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싸웠던 외로움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초에 불과한 그 작은 순간에.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내게 정말로 필요한 게 무엇이었었는지, 몸과 몸이 맞닿는 물리적인 온기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말이다. 그 후로 나는 따뜻한 체온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자주 쓰다듬고 안았다. 물론 지금이야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지만... 경쾌한 볼키스와 맞잡은 두 손과 품 안에 가득한 포옹이 그립다. 생존을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이 미친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다시 많은 사람들을 안을 것이다. 내 몸으로부터 그 '어떤 것'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감각이 상대에게 잊히지 않는 따스한 몸의 기억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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