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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Dec 13. 2018

#25. L에게

2018년 12월 10일 피렌체에서

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이었어. 뭐든 집중이 힘든 요즘이었거든. 그럴 때가 있잖아. 마음먹고 달려들어야 할 일은 넘치는데 몸은 귀찮고 머리는 번잡스러운. 일기장에 해야 할 일을 빼곡하게 적어 놓고서 퇴근 후엔 하염없이 걷기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들이 반복되었어. 그것도 꽤 오랫동안 말이야. 문득 사무실에 앉아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누군가 엿가락처럼 시간을 죽죽 늘리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길고 지루한 화요일 오후였지. 왜 하필 피렌체였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냥 피렌체로 골랐어. 몰타섬에서 들었던 이탈리아어가 따듯하고 정다워서 어느 도시든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가겠다고 결정하니 모든 게 쉽고 빨랐어. 토요일 점심에 떠나 월요일에 돌아오는 저가 항공 티켓을 휘리릭 결제하고, 시내에서 멀지 않은 숙소를 검색해 평이 나쁘지 않은 호텔을 골랐어. 연말 찬스로 월요일 휴가를 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공항버스를 탈 때까지도 '간다'는 것 말고는 아무 계획이 없었던 것 같아. 솔직히 반나절 시내 투어를 신청해 놓은 상태라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안일함도 있었어. 무엇보다 편안하게 다녀오고 싶었어. 시간을 버리고 와도 상관없다는 그런 마음으로. 읽고 있던 타티아나의 책을 끝내고, 안미옥 시집을 읽고, 좋은 음악을 듣고, 맛있는 파스타를 먹고, 낯선 거리를 헤맬 수 있다면 족하다고. 물론 신나는 과자 쇼핑을 하고 양손 두둑이 돌아와야지 하는 먹순이 다운 생각도 잊지 않았지만. 무서운 세관을 통과하고 (아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항상 세관은 떨릴까?) 비행기는 예정된 시간에 이륙했어. 좌석은 랜덤이었지만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았을 수 있었어. 하늘에서 내려다본 사파이어 빛깔의 지중해와 구불구불 그림 같은 해안선이 너무 아름다워서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어.


숙소는 버스가 다니는 대로변에 있는 작은 호텔이었어. 1층의 내 방은 작지만 천장이 아주아주 높았고 커튼과 침대보의 패턴이 큼직하고 화려했어. 대로변으로 큰 창이 나 있었는데, 창가에 서랍장처럼 생긴 튼튼한 의자가 있어서 거기에 올라앉아 바깥 풍경을 한참 내다보았어. 잿빛과 흰색 사이 어디쯤에 있는 파리의 색감과 달리, 피렌체의 색감은 노란색과 적갈색 사이 어디쯤이었던 것 같아. 어떤 전쟁도 두렵지 않은 튼튼한 사각의 건물이 좁은 골목길을 따라 성곽처럼 이어졌어. 건물마다 음각과 양각의 부조로 장식된 세련된 파리와는 또 다른 느낌이더라. 서유럽은 대충 비슷하지 않냐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다고 고집부렸던 내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달은 순간이었어.  


많이 걸었어. 지도를 보지 않고 사방으로 퍼진 오래된 골목을 발길 닿는 대로 걸었어. 걷다 보니 영화에서만 보던 두오모 성당이 눈앞에 보이더라. 예상한 대로 거대한 성당이긴 했지만 생각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어.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아. 세월이 오래오래 매만진 듯 어딘가 닳고 빛바랜 느낌이 참 좋았어. 연한 선홍색, 푸른색, 하얀색 대리석이 보석처럼 다채롭게 조화를 이루지만 채도가 낮아서인지 은은하게 아름다웠어. 걷다 보니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 강변에 다다랐는데 강을 보자마자 아늑한 기분이 들더라. 문득 다정한 센 강이 몹시 그리워졌어.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센 강을 좋아하는지, 강변을 따라 느리게 걷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참 이상해. 서울에 있을 때는 강이 이렇게 포근한 것인 줄 몰랐어. 한강은 대책 없이 깊고 춥기만 했는데 말이야.  


길에서 본 이탈리아 남자들은 예쁜 가죽 가방을 메고 다녔어. 그게 참 인상적이었어. 모서리가 깨끗하게 떨어지는 차가운 가방도 아니고, 명품 로고가 찍힌 멋없는 가방도 아니었어. 손 때가 묻어 번들거리고 내용물 때문에 자연스럽게 형태가 무너진 멋스러운 가죽 가방 말이야. 예쁜 가방을 멘 남자가 매력적이라는 걸 왜 나는 여태 몰랐을까. 그리고 물! 석회가 많아서 투박하고 무거운 프랑스의 물과는 달리 물이 미끈미끈하고 부드러워서 목욕시간이 행복했어. 그래서 둘째 날엔 시내에서 향이 좋은 분홍색 입욕제를 샀어. 그날 밤 크고 깨끗한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우고 몸을 담갔는데, 축축한 공기에 하루 종일 얼었던 몸이 정말 사르르르 녹더라. 집에 돌아오기 전 식당에서 와인을 한 잔 마시길 잘한 것 같아. 뜨거운 열기에 기분 좋은 술기운이 오르는데 노곤하니 참 좋았어.


오후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던 한국인 투어는 피곤했지만 유익했어. 이탈리아에서 15년 동안 살았다는 가이드 분이 우피치 미술관에서 중세부터 바로크까지 미술사를 정리해주고, 도시의 역사도 꼼꼼하게 설명해 주셨어. 근데 재밌는 게 뭔 줄 알아? 그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그 사람 영혼에 구석구석 깃든 피로가 먼저 보였다는 거야. 기나긴 이방인 생활에서 묻어나는 부침 같은 것 말이야. 투어를 함께 했던 한국인 무리는 쉬는 시간마다 그 사람에게 달려들어 맛집과 여행지 정보를 물었어.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맞은 여행객의 설렘과 호기심이 비눗방울처럼 떠다녔어. 그걸 바라보는 저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생각하게 되더라. 내 이방인 짬바로는 한참 모자랄 테지만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어. 남들에겐 꿈같은 여행지가 누군가에겐 밥벌이의 세계이거나 때로는 구잡스러운 일상의 벽지일 수도 있다는 거.


자랑할 것이 있어. 3일간 '1일 1 젤라또'를 실현했다는 사실!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꼬박꼬박 젤라또 집에 출석 도장을 박았다는 게 믿어지니. (초코와 바나나라는 확신과 불변의 원픽을 고수했다는 것도!) 설탕과 지방 분쇄기로 살아온 3n 년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지. 식당은 관광객이 붐비는 곳을 피해 다녔어. 둘째 날 저녁 산타크로체 광장에 있던 작은 식당에서 맛있는 파스타를 먹었어. 붉은 새우가 들어간 오일 베이스에 레몬 제스트를 뿌린 심플한 스파게티였는데, 면이 꼬독꼬독하고 새우 향이 진했어. 달지 않은 로제 와인을 곁들였는데 기분이 알딸딸하니 좋더라. 마지막 날 점심에는 동네 피자집에서 매운 소시지가 들어간 피자를 먹었어. 화덕에서 갓 나와 도우가 폭신폭신하고 토마토소스가 정말 신선했어. 레드 비어를 물처럼 들이켰는데, 혼자 취해서 테이블에 엎드려 잘 뻔했다고 하면 너는 또 웃겠지.


지금은 공항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어. 한 시간 반이나 연착하는 바람에 여태 피렌체에 발이 묶였네. 집으로 가는 길은 늘 멀고 험하지. 잘된 일인지도 몰라. 기다리는 동안 이렇게 너에게 여행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니까. 네가 있었다면 이 모든 이야기를 곁에서 재잘거렸을 텐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순간이 많았어. 뜨거운 뱅쇼 냄새로 가득한 크리스마스 시장. 갑자기 거세지는 비를 피했던 산 로렌조 성당의 허름한 카페. 이른 아침 안갯속에 잠긴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다본 적갈색의 삼각 지붕들. 모두 나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아쉬운 풍경들이야. 여행이란 게 꼭 가야만 하는 걸까 생각할 때도 있었는데 생각이 조금 바뀐 것도 같아. 꽤 즐거웠거든. 주말을 이용해 틈틈이 떠나보려고. 다음엔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게. 이제 비행기에 탑승할 시간이야. 무탈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줘. 그럼, Cha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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