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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Nov 22. 2018

#24. 느린 생활의 마음가짐

'온전히 누린다'는 것의 다른 말

프랑스 생활이 어떠냐고 물어올 때 나는 느려요, 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것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삶의 배경이 어디든 혐생은 혐생인지라 일터에서는 똥밭을 구르는 심경이지만, 일을 뺀 나머지 삶은 대체로 느긋하고 게으르다. 아주 천천히 이동하는 구름 같은 생활. 점심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점, 6시 퇴근 후 저녁 시간이 보장된다는 점, 주말 출근이 없다는 점도 한 몫하지만 무엇보다 도시 자체의 리듬 때문일 것이다. 징글징글하게도 변함이 없고 가끔은 답답하리만큼 느린 이 리듬이 나를 느슨하게 만든다. 전식, 본식, 후식으로 찬찬히 서브되는 음식을 상대와 두런거리며 오래오래 즐기는 것도, 센 강변을 따라 목적없이 두세 시간이고 걷는 것도, 튈르리 공원의 선배드에 기대앉아 천천히 해가 기우는 모습을 응시하는 것도, 샹드막스 풀밭에 담요를 깔고 오후 내내 시집을 읽을 수 있는 것도, 뱅센느 숲속에 누워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것도 다 이곳에서 배운 여유다.


느린 삶의 최대 장점을 꼽자면 '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돌이켜보면 서울에서는 목표 지향적으로 살았던 것 같다. 친구를 만날 때는 늦지 않으려고 헐레벌떡 뛰었고, 음식은 맛집으로 소문난 곳을 찾아다녔다. 그땐 '친구와의 만남' 혹은 '맛있는 음식'이라는 목표를 위해 금전과 시간과 피곤한 여정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이곳에서의 나는 약속 시간보다 한두 시간 일찍 나와 목적지까지 걷는다. 차가운 가을 공기를 마시고 바싹 마른 마로니에 낙엽을 밟기도 하면서. 진열창의 알록달록 마카롱에 정신이 팔렸다가, 신발가게를 기웃거렸다가, 금발 언니의 뒤태에 시선도 빼앗기면서. 친구를 만나면 맛있는 식당을 찾아간다. 메뉴판도 서빙도 계산서도 재촉하지 않으려 애쓰며, 느긋한 서버의 리듬에 맞춰 시계를 보지 않고 식사를 한다. 이렇게 긴 만남과 오랜 대화와 맛있는 음식이 주는 여운을 안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어쩐지 꽉 찬 기분이 든다. '약속'을 둘러싼 오늘의 모든 순간을, 모든 과정을 온전히 음미한 것 같아서다.


이 도시의 리듬에 적응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느림이 만드는 생활의 여백을 어떻게 채울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여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금세 결핍이 된다. 너무도 느리게 흘러가는 텅 빈 시간. 가족도 친구도 없는 이방인으로 그 텅 빈 시간 앞에 홀로 섰을 때 두렵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많은 유학생과 동료 외노자들이 이곳 생활을 힘들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느린 삶에도 대비가 필요하다. 여백을 채우기 위해 요리를 하고, 산책을 하고, 가끔 사람을 만나 온기를 불어넣고, 포근한 모국어로 된 활자를 읽고, 아무 말이든 끄적여보는 것이다. 고백건대 아직도 나는 느린 삶이 어렵다 (혹은 두렵다). 숱하게 실패했고 여전히 자주 실패한다. 어느 날은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폭식을 하고, 어느 날은 오후 내내 깨지 못할 정도로 운동을 하고, 어느 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멍청한 유튜브 영상을 보며 하루를 보내고, 어느 날은 궁금해 하지도 않을 내 사생활을 늘어놓으며 회사 동료를 놓아주지 않는다. 공허함. 외로움. 모두 여백이 결핍이 된 탓이다.


'순간을 온전히 누린다'는 건 그만큼 '순간을 온전히 견뎌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순간순간의 기쁨과 즐거움을 천천히 음미하는 만큼, 고통이나 슬픔, 분노와 같은 불편한 감정도 천천히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사건에도 온 영혼이 흠뻑 젖는 느낌. 그 고통스러운 여운을 온전히 견뎌야 하는 것도 나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느린 삶이 나를 넉넉하고 여유 있는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이 '온전히 견뎌야 하는' 경험을 몇 번 거치고 나면 오히려 사람이나 감정 같은 외부 자극을 경계하게 된다. 어떻게든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나름의 견디는 메뉴얼도 생겼다. '오늘은 운동을 15분 더 해야지', '도서관에 등록해야지', '퇴근하고 불어 문법책을 풀어야지', '초콜릿을 덜 먹어야지' 식의 사소한 과제를 만드는 것인데, 사실 완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성공하는 날도 있고 실패하는 날도 있고 그래서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렇게 버티다 보면 어느새 다 지나가 있다는 것을 이젠 너무 잘 안다.


그럴 땐 서울을 떠올린다. 지하철 2호선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 8차선 도로를 질주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자동차. 삼겹살집에서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사람들. 포장마차에서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하얀 김, 음식 냄새. 종로 밤거리의 네온사인. 곳곳의 매장에서 흘러 나오는 시끄러운 가요와 통유리 너머 따스한 호박색 전등이 주렁주렁 열린 까페들. 서울의 다이나믹한 자극과 분주한 생활 리듬 속에 그냥 묻히고 싶을 때가 있다. 빠르고 정신없이 살아도 가끔 편의점에서 친구와 캔맥주를 마실 수 있고, 명절이면 고향 집에 내려가 바다도 보고 자전거도 타는 생활을 나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도 하면서. 물론 느린 도시로 떠나 온 건 나의 선택이고, 그 속도란 것이 나라는 인간의 바이브와 대체로 맞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방심하면 달려드는 결핍이나, 떠날 줄을 모르는 어떤 감정의 여파에 지칠 때는 ‘느린 삶을 건강하게 가꾸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싶다.


한 번씩 해외 생활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들어보면 대부분 바쁘게 돌아가는 한국 사회가 갑갑하다는 하소연일 뿐이지만, 요즘엔 그런 사람들에게도 귀띔해준다. 느린 생활을 꾸리는 데도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삶의 여백을 채워야 한다고.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만큼 온전히 견디는 날들도 많다고. 그걸 버티는 나만의 메뉴얼을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느린 삶을 배워가는 이 과정이 싫지 않다. 기쁨을 충만하게 느끼는 만큼 슬픔도 오래오래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람, 스스로의 힘으로 차곡차곡 삶의 빈칸을 채울 줄 아는 단단한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은 서툴지만 언젠가 이 도시가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 믿는다. 조금씩 조금씩. 안쪽에서부터 단단하게 차오르는 코어근육처럼. 그래서 이 도시의 속도가 몸속에 새겨지기를 바란다. 그땐 이곳을 떠나도 괜찮을 것 같다. 어디를 가든지 나만의 속도로 느리게 걷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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