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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Oct 31. 2018

#23. 2018년 10월 28일의 로그

'혼자'라는 감각을 기억하기 위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바깥이 어둑했다. 범인은 새벽의 어둠이 아니라 하늘을 메운 비구름이었다. 사나운 바람이 불어 겉창이 딱딱 소리를 내며 창문에 부딪쳤다.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자 7시 30분이었다. 자정을 한참 넘기고 잠들었던 것 치곤 이른 기상이었다. 일요일인데 조금 더 잘까 하다가, 문득 오늘부터 서머타임이 해제된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러니까 원래라면 8시 30분이라는 이야기다. 탁상시계를 한 시간 앞으로 돌리며 공으로 한 시간을 번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 이불을 둘둘 말고 멍하니 조금 더 누워있었다. 배가 고팠다.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다. 어젯밤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샀던 알감자 봉지를 찬장에서 꺼냈다. 봉지 겉면에는 전자레인지에 그대로 넣고 익힐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가위로 조그만 구멍을 낸 뒤 전자레인지에 넣고서 10분을 맞추었다. 전자레인지가 웅웅거리며 감자를 익히는 동안 냉장고에서 감 두 개를 꺼내 깎았다. 요즘엔 제철 감 먹는 재미로 사는 것 같다. 씨도 없고 말랑한 게 한국 감 맛에 지지 않는다.


얌전히 깎은 감 접시와 알감자 그릇이 놓인 트레이를 들고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유튜브에 접속해 최애돌의 콘서트 직캠 영상을 틀었다. 퇴근 후 덕질은 최고의 피로회복제이자 저물어가는 하루를 찬란하게 밝히는 일몰 같은 행위지만 늘 절제가 필요하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최소한의 수면시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말의 덕질에는 브레이크가 없다는 방만함의 미덕이 있다. 최애돌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며 느긋하게 아침을 먹는다. 트레이를 대충 머리맡에 두고 이불과 한 몸이 되어 모니터에 집중한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영화 '아가씨'에 나오는 저택이 등장하는 몹시 오컬트적인 꿈을 꾸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눈을 떴을 때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렌즈를 끼고 세수를 하고 로션을 바른 뒤 운동복을 갈아입었다. 헬스장 키와 집 열쇠와 수건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집을 나섰다.


헬스장에 들어서자 더운 열기가 느껴졌다. 유산소 운동실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투쌍(프랑스 만성절) 방학 기간이라서인지 아이들이 많았다. 비어있는 운동기구를 발견하고 잽싸게 자리를 잡았다. 오늘의 선곡은 최애돌의 데뷔 앨범이다. 신인의 패기가 엿보이는 빡센 비트에 맞춰 헛둘 헛둘 팔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땀을 뚝뚝 흘리며 운동에 집중하는데 보이스톡이 걸려온다. 한국의 O다. 한국과 프랑스라는 물리적 거리가 무색하리만큼 자주 톡을 주고 받는 O지만, O가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일은 드물다. 망설임 없이 받았다. 직장 , 상사 뒷담화, 이사, 소개팅 등등 통화는 운동기구를 세 번 바꿔 타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운동을 했는지 통화를 했는지 모르게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통화는 계속되었다. 어느새 두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사이 땀이 다 식어 오소소 몸이 떨렸다. 전화기를 어깨에 걸치고 O의 말에 이따금씩 장단을 맞추며 빨래를 개고 널려있는 옷가지를 정리했다.


냉장고를 열었다. 어제 오후 한 냄비 가득 만들어 놓은 소고기 토마토 스튜가 보였다. 1인용 라자냐 그릇을 꺼내 스튜를 담고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막스앤스펜서에서 산 체다치즈믹스를 꺼내 듬뿍 올리고, 얼마 남지 않은 바질 가루도 남김없이 뿌려주었다. 오븐에 넣고 180도에 15분 동안 구워주었다. 치즈의 겉면이 노릇노릇해지는 동안 차콜색 테이블보를 깔고 포크와 피클을 꺼냈다. 오븐에서 나온 스튜를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바게트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다. 설거지통에 접시와 식기를 넣고 욕실로 향했다. 선물 받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틀고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서 오래오래 몸을 씻었다. 욕실에서 나오자 몸이 뜨근뜨끈했다. 머리를 말리고 바디로션을 발랐다. 시계를 보지 않고 천천히 몸을 씻고 말릴 수 있다는 것도 주말의 큰 기쁨이다. 새 잠옷을 꺼내 입고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머리맡 탁자에 놓인 시집을 꺼내 든다. 요즘 읽고 있는 시집은 이혜미 시인의 <뜻밖의 바닐라>다.


"우리는 아름답게 걷는다. 근사하지만 하나는 아니야. 우산이 언제나 비보다 느리듯 생각은 늘 피보다 느리고. 근사하다는 건 가깝다는 것. 나는 하얗고 너는 희다. 나는 혼자이고 너는 하나뿐이다. 비슷하지만 같은 건 아니야. 우리는 서로의 지붕에 지붕을 보태며 지속되는 빗속을 조금 가깝게 걸어간다.(p.31, '개인적인 비')" 약속이 없는 일요일 오후에는 소설보다는 시를 읽고 싶다. 서사에 손목을 붙들린 채 이리저리 뛰고 싶지 않은 기분.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 성긴 행간 속에서 오래 머무르고 싶다. 음악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방에 옅은 오후의 볕이 서서히 비스듬해진다. 사위가 어두워지고 활자의 뒤를 밟는 속도가 더뎌지자 몸을 일으켜 조명을 켠다. 컴컴한 방안에 노란색 불빛이 서서히 퍼지고. 조금은 답답한 기분이 들어 '해도 졌겠다 나가서 좀 걸을까?' 하던 찰나에 생수가 떨어졌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저녁 산책을 나가야만 하는 참 완벽한 구실이다. 옷을 갈아입는다. 검은 목폴라에 파란색 니트를 겹쳐 입고 털잠바를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비를 머금은 차가운 밤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찌나 바람이 거센지 가로수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흔드는 것 같았다. 목적지는 쌩 술피스 성당.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이어폰을 낀 채 걸었다. 궂은 날씨 탓인지, 벌써 월요일을 준비하는 건지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총총총 찬바람을 마시며 걸으니 정신이 맑아졌다. 쌩 술피스 성당 앞은 골동품 파는 천막으로 가득했다. 성당 근처의 막스앤스펜서에 들어가 생수 두 병과 할로윈 펌킨 모양 은박지로 싸인 초코볼 한 망과 비스킷 한 상자를 샀다. 생수병을 양팔에 안고서 집을 향해 다시 걷는다. 걸으며 여백으로 가득한 이 생활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것도 예정되지 않고,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이 일요일은 행복일까. 행복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언젠가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올까. 아마 그럴 것이다. 싫지만은 않은 이 '혼자'란 감각을 오래오래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빈 아파트 문을 열고 불을 켰다. 향초에 불을 붙이고 바로 책상에 앉았다. 동그란 초코볼을 입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이 글을 쓴다. 오늘은 2018년 10월 28일 일요일. 이렇게 하루가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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