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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May 19. 2019

#27. 혼자를 견디는 당신에게

2019년 5월의 기록

사직서를 내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스 여름 바캉스 기간에 맞춰 서울에 다녀온 일 말고는, 이렇게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본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3년 반 만에 처음으로 떠나는 봄 휴가인 셈이었죠. 나무가 많고 밤하늘이 예쁜 여행지를 찾다가 당신이 사는 나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처음 이틀은 북쪽에 있는 작은 소도시를 방문했습니다. 도시의 길목을 바지런하게 걸으며 시간을 보냈죠. 많은 이야기가 깃든 건축물과 풍경을 감상하고,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을 견주는 일은 늘 그렇듯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그러면서도 이 순간을 누군가와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외로웠던 것 같아요. 바보 같이 좋은 건 왜 자꾸만 나누고 싶어 지는 걸까요. 혼자 담아두고 마는 게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말이죠.


나머지 4일이라는 시간은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보냈습니다. 회사 동료 E가 여행에 합류해서 4일 중 3일은 E와 함께 보내게 되었죠. 털털하고 다감한 E는 의외로 나와 잘 맞는 여행 메이트였습니다. 드문드문 하얀 눈이 내려앉은 설산과 선명한 초록의 숲과 장난감 같은 집을 보며 우리는 끊임없이 감탄을 내지르고 감상을 쏟아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진을 찍은 여행은 생애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한 이불속에서 꼼지락대며 회사 바깥의 사정에 대해 두런거린 것도 즐거운 기억입니다. 캄캄한 방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늘 머리맡에 작은 전등을 켜야 한다는 나지막한 E의 고백에 마음이 서늘해지기도 했습니다. 홀로 별을 보러 나갈 때 E는 숙소 현관에서 나를 기다려주었습니다. 밤하늘에 엷은 구름이 걸려 있어 많은 별을 보지 못했지만 행복했어요. 내게 필요했던 것은 여행이 아니라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나는 하루 일찍 파리로 돌아가는 E를 기차역까지 배웅하고 혼자 숙소를 찾았습니다.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나는 당신이 오랫동안 닻을 내리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았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오랜 이방인 생활이 주는 피로, 관성, 권태, 체념, 경계 그리고 결핍. 뭐 그런 것들요. 어쩌면 내게 익숙한 것이기에 더 빨리 눈에 들어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열 명 남짓한 어린 여행자들과 맥주를 마셨습니다. 각자 돌아가며 긴 유럽 여행의 다음 행선지를 자랑하고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던 중, 내 이야기를 내놓아야 하는 차례가 왔죠. 파리의 외노자라는 내 소개에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저 멀리 대각선에 앉은 당신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무는 것을 느꼈습니다. 얼마 전 사직서를 냈다고, 그래서 프랑스 생활을 접게 될 거라는 나의 고백에 어디선가에서 왜?라는 물음이 튀어나왔습니다.


내일이면 다시 볼 일이 없는 여행자들 앞에서 솔직할 필요는 없었습니다만, 그냥 솔직하고 싶었습니다.  "5년 동안... 저는 너무 힘들었어요." 그 말을 할 때 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던 당신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처음부터 당신의 오랜 이방인 생활을 알아본 나는 당신에게 지금껏 어디에서 해외생활을 했는지 물었습니다. 줄곧 농담 따먹기를 하던 당신이 웃음기를 지우고 당신의 이야기를 아주 조금 꺼내놓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나도 힘들었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알 것 같았습니다. 힘들었다, 그 말 뒤에 감춰진 수만 겹의 외로운 시간을요. 당신도 내게서 같은 것을 보았겠지요. 아무도 없는 텅 빈 나날.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별. 주인 없는 전화번호만 허물처럼 벗어 놓고 떠난 사람들. 남겨진 사람의 공허함.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 자기 방어. 경계와 거리. 커지는 결핍. 조금만 다정해도 와르르 무너져버릴 것 같은. 그러니까, 혼자를 견뎌야 했던 지난한 순간들을요.


당신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파리로 돌아가는 나는 '질척이고 싶은 마음'을 이겨야 했습니다. 마음을 지키려면 늘 거리와 경계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배웠으니까요. 두려웠던 것도 같아요. 그동안 힘들었어요, 사실 떠나기 싫어요, 나는 느리고 조용한 이 도시가 좋아요, 그런데 혼자를 견디는 게 점점 버거워져요, 자꾸만 내가 내 안에 갇히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서로 끌어안고 의지할 수 있는 한 사람, 아니 내게 다정한 단 한 명만 곁에 있었어도 나는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았을 것 같아요, 당신을 붙들고 대책 없이 쏟아낼 것 같았거든요. 다음날 아침, 나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니 당신의 시선에 자주 화답하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한 번이라도 더 눈 맞추고 웃어줄 걸. 눈으로 당신을 더 알아줄 걸. 떠나기 전 말없이 한 번 안아주었다면.


그날 밤 당신이 테이블에 앉은 나를 뒤에서 바라보다가 '잘 가'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뒤돌아보며 "갑자기 왜 나를 보내려고 하냐"며 큰소리로 웃었지만, 사실 그 의미를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또 어디서 어떻게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도 당신이 어디로든 '잘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찾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든, 꼭 찾기를 바랍니다. 그곳에서 안전하게 닻을 내리고, 곁을 지켜주는 따뜻한 사람들 속에서 단란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의 다음 행선지가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나라에서 다시 한번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꼭 눈을 맞추고 당신의 안녕을 빌어줄게요.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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