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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Nov 01. 2019

#32. 프랑스는 우리를 강하게 한다

도난 3종 세트가 내게 남긴 것은

마드리드를 여행할 때였다. 6월 말이었는데도 점점 기온이 올라가더니 한낮에는 42도를 찍었다. 살기 위해 옷차림도 짐도 가볍게 해야 했다. 민소매 티에 하얀 에코백을 들었다. 그렇게 외출하는 내게 민박집 사장님이 말했다. "마드리드에 오면서 에코백 이라니... 용감하시네요." 마드리드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별 대꾸 없이 "아... 네." 하고 말았지만, 사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웃었다. 아니, 이 양반이 장난하시나, 나한테 소매치기로 겁을 준다고? 빡세기로 유명한 파리에서 먹은 짬이 얼만데,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그때로 돌아가 내 뒤통수를 세게 때리며 말하고 싶다. 처웃지마, 미래의 니 얘기니까... 


파리로 돌아와서 정확히 이 주 후, 나는 지갑을 소매치기당했다. 태양이 정수리 위에 떠 있는 대낮, 심지어 거리 한복판에서였다. 귀국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집 안의 자잘한 공사가 많았다. 일요일 오후였다.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1구의 페인트샵에 갔다. 필요한 도구를 사서 집으로 향하는데, 길거리에 유독 사람이 많았다. 투르 드 프랑스 선수들이 파리에 입성하는 날이었다. 도로가 통제되었고, 시민들은 샹젤리제로 향하는 선수들에게 환호와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변명을 덧붙이자면, 귀국 이사를 준비하느라 한참 정신이 없던 시기였다. (문제의 그) 에코백을 허버허버 메고 인파를 헤치며 전진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커피를 한 잔 살까 해서 스타벅스에 들어갔는데... 지갑이 사라졌다. 언제 가져갔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가방 속이 엉망진창이었을 텐데 감쪽같이 지갑만 쏙 빼갔다. 참으로 베테랑다운 (칭찬 아님) 솜씨였다. 현금을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체크카드, 신용카드, 최애돌의 팬클럽 카드, 명함, 증명사진까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렇게 귀국을 목전에 두고 도난 3종 세트가 완성되었다. 1. 지갑 2. 휴대폰 그리고 3. 집. 휴대폰을 도난당한 건 체류 3년 차 때였다. 생애 처음으로 당한 소매치기였다. 사건은 고전적인 장소에서 벌어졌다 (이래서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건가). 소매치기들의 단골 무대인 지하철, 뻔하디 뻔한 루브르 역에서였다. 1호선에서 7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걷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한 아주머니가 쭈뼛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저기 저 남자들이 아가씨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갔다"고 말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휑했다. 뒤를 돌아보니 덩치 큰 흑인 장정 둘이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따라갈까 했지만 험한 꼴을 볼 수도 있겠단 생각에 포기하고 말았다. 아주머니는 현장을 목격하고 알리려 했지만, 그 사내들이 눈빛과 손짓으로 겁박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다음날 경찰서를 찾았다. 조서도 작성했지만 찾을 확률은 희박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경찰서가 처음은 아니었다. 나의 프랑스 경찰서 데뷔(?)는 10년 전 리옹에서였다. 경찰차에 타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 물건을 절도당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집이 털렸다. 도난 시리즈 중 가장 피해 규모가 크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집 앞이 사람들로 어수선했다. 물어보니 도둑이 들었다고 했다. 느낌이 싸했다. 아니나 다를까 총 일곱 집이 털렸는데, 그중의 하나가 내 집이었다. 올라가 보니 문고리가 아주 작살이 나 있었고,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귀중품은 없었지만, 놈(들)은 디카, 아이팟, 한국에서 쓰던 핸드폰, 산 지 10일도 안 된 새 노트북까지 전자제품만 얌체같이 골라 튀었다. 다행히 집보험을 들어서 문고리 수리비 (어마어마했음)와 영수증이 남아있던 새 노트북은 보상받을 수 있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도난 3종 세트의 화려한 피날레답게) 역대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다. 특히 보상을 받기 위한 절차가 몹시 복잡하고 지난했다. 


민박집 사장님의 우려가 무색하게, 마드리드에서 나는 끝까지 소매치기를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복병은 따로 했었다. 길을 가던 중 현금을 뽑으려고 ATM 기계에 프랑스 카드를 넣었는데 (같은 유럽 연합이라서 문제없음) 삐삐 삐삐, 요란한 경보음이 울리더니, 기계가 카드를 먹어버렸다. 수중의 유일한 카드였다. 하필 아무도 일하지 않는 일요일이었고, 나는 다음날 파리로 돌아가야 했다. 마드리드 길바닥에서 말 그대로 멘붕상태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와중에 피를 차갑게 식히고 이성적 사고를 풀가동하는 내가 있었다. 콜센터와 통화 가능한가? 카드를 꺼내 줄 직원을 보내줄 수 있는가? 최악의 경우, 카드를 버려도 되는가? 카드 만료 시한은 언제인가? 정지 신청은 즉시 가능한가? 숙소에 둔 현금은 얼마나 있는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은 얼마인가? 나는 차분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도난 3종 세트와 같은 사건을 겪으며, 나의 '문제 해결 능력'이 놀라우리만치 향상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별 일이 다 있었다. 갖가지 이유로 길지도 않은 체류기간 동안 이사를 일곱 번이나 했으니까. 베드버그 창궐, 세입자의 자살, 건물 폭발 같은 것들도 한국이었다면 겪지 않았을 일일 것이다. 매 순간 힘들었지만, 지금은 원망스럽기보다는 대견한 마음이 더 크다. 누군가 내게 프랑스에서의 시간이 어땠는지 묻는다면 나는 "프랑스가 나를 참 강하게 만들었다"고 답할 것이다. '프랑스에 오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특히 위기 앞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웠던 한 시절을 뒤로 하고,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다. 프랑스가 내게 남긴 이 단단함이 끝이 아니라, 튼튼한 시작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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