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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Nov 01. 2019

#31. 계획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지만

요란한 시작, 끝까지 우당탕탕

프랑스 출국을 삼일 앞둔 추석이었다.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 이모네에서 추석을 함께 보내고, 나는 인천에서 출국할 예정이었다. 온 가족이 잠든 새벽, 배가 아파 눈을 떴다. 저녁부터 아랫배가 갑갑하더니 통증이 심해졌다. 한참 끙끙거리다가 부모님을 깨웠다. 곧 식은땀이 줄줄 흐르더니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나는 결국 엠뷸런스에 실려 (추석 댓바람에) 응급실을 찾았다. 급성 맹장염이었다. 아픈 사람, 다친 사람, 맞은 사람, 취한 사람들의 버라이어티한 사연을 강제 청취당하며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수술을 받고 삼 일 후 퇴원했지만, 다시 아빠 차의 뒷좌석에 실려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일주일 간 요양의 시간을 가진 후에야 복대를 차고 (복압이 높아져서 봉합부위가 터질 수도 있다고)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프랑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출국할 때의 일이다. 이번엔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을 날아왔다. 최종 행선지는 외곽에 사는 친구의 집이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 타고 기사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를 보여주었다. 한참을 달린 그는 나를 낯선 동네에 떨구어 주었다. 아파트가 첩첩이 이어진 미로 같은 구조였다. 개통되지 않은 핸드폰으로는 전화는커녕 구글맵도 쓸 수 없었다.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심정으로 건물들 사이를 헤맸다. 우여곡절 끝에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벨을 눌러도 답이 없었다. 주저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는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언제까지 길거리에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민자가 많고 사건사고도 많은 동네였다. 31kg짜리 캐리어를 끌고 집채 만한 백팩을 멘 동양 여자는 어둠 속에서도 눈에 뜨일 것이었다. 불빛, 사람, 와이파이가 있는 어디라도, 맥도날드라도, 찾아야 했다.


주택지구였던 동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놀라우리만치 인적도, 상점도 드물었다.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그때, 건물 주차장에서 히잡 쓴 여자가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캐리어를 질질 끌며 미친 듯이 달려갔다. 여자의 팔을 붙들고 손짓 발짓하며 상황을 설명했다. 난감한 표정과 함께 '이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속으로 망했네... 어쩌지... 하는 찰나, 여자가 내게 뜻밖의 제안을 했다. 무선 인터넷을 원한다면, 자기 집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뭐든 비 오는 길바닥에서 밤새는 것보다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여자의 집에 따라 들어갔다. 동양풍의 카펫과 장식이 있는 작은 아파트였다. 경계를 풀 수 없었던 나는 인터넷이 연결되자마자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세 시간쯤 뒤에 전화 한 통만 걸어줘. 답이 없다면 나 실종된 거니까 대사관에 전화 좀 넣어줄래.>


걱정이 무색하게 여자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여자는 내게 따뜻한 차를 내어주고 차분히 나를 기다렸다. 친구는 여전히 연락두절이었다. 동기가 소개해 준 하숙집에 연락해 보았다. 주인아주머니는 다행히 방 하나가 비었으니 서둘러 오라고 했다. 너무너무 고마운 마음에 한국에서 가져온 식품이며 기념품을 탈탈 털어 여자에게 안기고 나오는데, 여자가 나를 데려다주겠다며 따라나섰다.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밤이 늦었다며 나를 차에 태웠다. 하숙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아주머니가 끓여주는 라면을 먹고, 씻고, 한국의 친구에게 무탈함을 알린 후 자리에 누웠는데 어리둥절했다. 내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프랑스에서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요란하고 엉뚱한 시작이었다. 기대나 설렘을 느낄 여유 따위 주지 않는.


삐걱거렸던 이 두 번의 시작이 그땐 그렇게 힘들었다.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친구는 그러고도 한참 소식이 없었다. 빠르게 그를 손절했지만 한동안 몹시 우울했다. 샤워를 하고 혼자 알코올 묻힌 면봉으로 배꼽을 후비던 것도 (복강경 수술이었음) 참 싫었던 기억이다. 팬티바람으로 옹송그린 내 모습이 외롭고 서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계획대로 되지 않아 다행인 일들이었는데 말이다. 언젠가 터질 맹장이었다면, 출국 직전에 터지는 게 나았다. 하마터면 이역만리에서 보호자도 없이 수술대에 오를 뻔했다. 링거를 주렁주렁 매달고 걸었던 산책로, 병원 벤치에서 아빠가 해준 무릎베개도 다정한 추억이 되었다. 낯선 동네에서 받은 뜻밖의 호의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얼떨결에 살게 된 하숙집에서도 좋은 일이 많았다. 거기서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취직도 했다.


삐걱였던 시작은 귀국하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셀프 체크인 기계에 등록된 수화물이 0개로 뜨는 바람에 직원에게 인계된 일. 짐도 못 부치고 한 시간 넘게 에어프랑스에서 대기했던 일. 출국장에서 체류증을 내놓으라며 세관에 붙잡힌 일 (아니, 회사에서 반납하라고 해서 반납했는데!!!). 보딩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은 급한데, 공항 전철이 (하필) 고장이라 미친 듯이 뛰었던 일... 마지막 순간까지 감상에 젖을 여유조차 없었다. 우당탕탕, 내 프랑스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배운 게 있다면, 인생이 절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겸허해졌다는 것? 인간인지라 빡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돌아가더라도 빠져나갈 방법은 있고, 삑사리는 어떻게든 수습하게 된다는 것을 이제 안다. 프랑스 생활의 종지부, 저 모퉁이를 돌면 어떤 우연과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다. 새로운 시작이 두렵지만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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