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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Oct 19. 2019

#30.  파리의 우울

‘어디’ 보다는 ‘누구와’가 중요한 생활

파리에서 처음 살았던 집은 7호선의 종점이었다. 파리와 남쪽 외곽의 경계였다. 파리라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곳에 주택들이 모여있었다. 고풍스러운 유적지나 화려한 쇼윈도가 밀집된 시내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무척 고요한 동네였다. 관광객들이 하나 둘 빠져나간 기차 칸에는 종점에 다다를 때 즈음 피로한 얼굴과 남루한 차림의 생활인만 남았다. 대부분이 (나와 같은) 외국인이거나 이민자였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면 마그레브 사람이 운영하는 작은 슈퍼와 중국인이 운영하는 빵집이 있었다. 상점을 지나쳐 삼백 미터쯤 더 걷다 보면 집이 보였다. 곳곳에 칠이 벗겨진 초록 대문에 오래된 열쇠를 꽂아 돌리면 작은 정원과 노란색 주택이 나타났다.


아담한 삼층집이었다. 그곳에 여섯 명의 하숙생과 집주인이 살았다. 모두 한국인이었다. 1층에는 주인아주머니가, 2층에는 남학생 세 명이, 3층에는 여학생 세 명이 사는 구조였다. 나는 세 명의 여학생 중 하나였다. 한동안 북적북적 재미있게 살았던 것 같다. 귀가시간이 맞으면 함께 요리를 했고, 새벽까지 공용 부엌에서 맥주를 마시는 날도 많았다. 안전한 동네는 아니었으므로 밤늦은 시간에는 짝을 지어 귀가했다. 남학생들이 지하철역까지 데리러 오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뜨내기 유학생들이 그렇듯, 세입자들은 정이 들 때쯤 모두 아쉬운 얼굴로 집을 떠났다. 빈 방은 금세 새로운 얼굴로 채워졌다. 몇 번의 이별을 반복한 나는 자연스럽게 세입자들의 안부를 묻지 않게 되었다.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니 마주칠 일도 없었다.


어느 날 남학생 한 명이 들어왔다. 계단에서 마주친 집주인 아주머니는 '아는 분의 부탁으로 우리 집에 머물게 되었다'라고 했다. 2층 가장 안 쪽에 있는 방이었다. 내 방 바로 아래층이기도 했다. 나는 계단에 서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인사했다. 내 말소리를 듣긴 한 건지 그 애는 나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기분이 언짢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차피 마주칠 일도 없었다. 후에 아주머니는 그 애에게 '아주 작은 문제'가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 '작은 문제'가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다. 다만, 내게 무성의했던 그 애를 아주머니가 특별히 아꼈다는 것은 기억난다. 다른 세입자 E는 '그 애가 좀 이상하다'며 불편함을 토로했다. 첫 만남 이후로 나는 그 애와 마주치거나 말을 섞은 적이 없다. 내게 그 애는 아래층에 사는 '이상한 애'일뿐이었다.


회사에서 업무를 보는데 E에게서 전화가 왔다. 평소라면 전화가 걸려올 리 없는 시간이었다. 받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로 E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아주머니 부탁으로 그 애 방문을 열었는데...." E는 그 애가 제 방에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그 날 아침 집주인 아주머니는 출근길에 E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날부터 그 애가 연락이 없어 불안하니 방문을 열고 확인해보라고 했다. 방을 열어 보고 혼비백산한 E는 어쩔 줄을 몰라 내게 전화를 걸었다. 집안에는 E밖에 없었다. 나는 침착하게 일단 집에서 나가라고, 그리고 아주머니에게 연락하라고 말했다. 그날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였다. 경찰이 다녀갔고 소방관이 그 애를 실어갔다고 했다.


처음에는 E의 곁을 지키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날 이후 E는 혼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내 방의 한 켠을 내어주었다. E에게 심리 상담을 권했지만 E는 의연하게 웃으며 거절했다. 하지만 샤워할 때, 세수할 때 눈을 못 감겠다는 말을 듣자, 이 집에서 빨리 E를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E가 새 집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도왔다. E가 나가고 얼마 후 나도 그 집을 나왔다. E가 집을 떠나고, 홀로 내 이사를 준비할 때가 가장 지옥 같았다. 그즈음의 내 심리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일을 하면서, E를 돌보고, 집을 찾고, 이사를 준비하느라 매일매일이 벅찼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세입자들이 줄줄이 떠나간 집의 고요를, 내 발아래의 침묵을 견디는 일이었다.


이것은 파리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무거운 기억이다. 이름도 모르는 아래층 세입자의 죽음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 애가 오랫동안 아팠다는 것, 강도 높은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자주 그 애를 생각한다. 언젠가 집으로 가는 길에 멀찍이 그 애를 본 적이 있다. 그 애는 조금 걷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다시 몸을 돌려 조금 걷다가, 또다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상한 모습으로, 한참을. 그때는 참 이상한 사람이 다 있네, 하고 지나쳤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습이 선명해진다. 그 길을 서성이는 그 애의 마음을 자꾸만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 나아가 보려고 그 애는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을까. 내면은 얼마나 전쟁터 같았을까.


살면서 알게 되었다. 파리에는 그 애처럼 아픈 사람들이 많았다. 주로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사람들이었다. 온기에 굶주린 사람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겪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한식당 사장님과 했던 대화가 생각난다. 사장님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사람이 없다며 슬퍼했다. 파리 교민 수가 이천여 명에 불과한 이유, 그 수가 늘 일정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정착하려는 사람만큼, 떠나려는 사람이 많다고. 참 외롭고 우울한 도시라서 그렇다고. 동감한다. 파리에는 우울이 있다. 낭만과 아름다움 뒤에 드리운 그림자처럼. 내가 겪은 건 자신에게 끝없이 파고들게 되는 우울함이었다. 고독하다고 생각했던 생활이 점점 폐쇄적으로 변하다가, 어느 날 자폐적인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 졌다.


파리에 살고 싶다고 눈을 반짝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은 일을 찾고, 이 도시에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려줄 수는 없지만, 이 말을 하고 싶었다. 파리에는 자신에게 끝없이 파고들게 하는 척척하고 음울한 바이브가 있다고. 언제든 함께 길 위를 서성여 줄 누군가가 (배우자든, 친구든 누구라도)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 어디에 사느냐보다, 어떤 공동체를 만들고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우울은 어디에나 있을 테니까. 파리를 떠나며 그 애를 많이 생각했다. 그 날, 길 위를 방황하는 그 애에게 한 번 다가가 볼걸.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없어도, 그냥 함께 서성여줄걸. 아주 오랫동안 미안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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