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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Aug 08. 2020

#46. 당신이 잃어버린 무위의 기술*

나만의 속도로 걷는 오늘, 그리고 내일

누군가 내게 어린 시절 어떤 아이였는지 물어오면,  가지 특징이 떠오른다. 하나는 천성적으로 '공감 능력'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읽어주는 동화책 속의 묘사를 듣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울었던 일과 캐나다 여행을 다녀온 언니의 후일담을 듣다가 별안간 꺼억꺼억 오열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머지 하나는 각별한 '(無爲) 능력'이다. 지금도 엄마는 우리  남매의 육아 썰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 있던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런 나를 일으켜 유치원에 등원시키는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말이다. 달리 말해, 어릴  나는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술' 본능적으로 알았다. 뭐랄까... 타고난 무위의 천재였달까.


그러나 대한민국의 빡빡한 교육 현실에 몸을 던지면서, (수많은 예체능 영재들이 그러하듯) 타고난 나의 재능들은 유년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의외로 나는 책상에 곧잘 붙어 있는 아이였고, 공부에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였다. 성취와 인정의 달콤함에 익숙해질 무렵, 어느새 나는 문학적 감수성보다 언어 영역 등급이 중요한 청소년이 되어 있었다. '무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아이 역시 그 기술을 점차 잊어 갔다. 경주마처럼 달려 입시라는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는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건 대학생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내내 나를 압박했던 평가도, 경쟁도 사라졌지만, 어쩐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불안했다. 형체 없는 무엇인가가 쫓아오는 기분. 그래서 동아리 활동을 하고, 독서를 하고, 외부의 인문학 강의를 찾아들었다. 청춘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기에 여행을 다녔고, 풋풋한 나이를 즐겨야 한다기에 소개팅과 연애를 했고, 사회 경험도 필요하다기에 서빙 알바와 과외를 했다. 이후 번역가라는 꿈이 생기고, 석사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취직을 하는 동안 시간은 더욱 숨가쁘게 흘렀다.


회사는 프랑스 법을 따랐으므로 노동자에게 후한 편이었다. 점심시간은 2시간, 휴가는 25일, 야근도 주말 출근도 없었다. 회사 앞으로 이사를 오면서,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는 날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점심시간이 땡 하자마자 부리나케 나와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정신없이 걷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광장의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밥을 먹고, 낮잠까지 잘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이렇게나 길었나? 하는 놀람과 함께,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그러자 몸에서 긴장이 풀리며, 빨랐던 걸음이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늦춰졌다. 몸에 힘을 빼고 느리게 걷는데, 그 느낌이 생경했다. 그런 속도로 걸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걸음이 느려져도 바뀌는 게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렇게 느리게 걸어도 '괜찮았다'. 아무도 내게 뭐라 하지 않았고, 누구도 쫓아오지 않았고, 세상이 무너지지도 않았으며, 낙오자가 되지도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가벼워진 옷차림이, 이른 봄을 반기는 표정이, 샌드위치를 먹으며 즐기는 여유가 눈에 들어왔다. 헐벗은 가지 끝에 대롱대롱 붙은 초록의 눈들이 보였다. 등 위로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집과 회사를 잇는 그날의 짧은 여정은 꽤 드라마틱한 변곡점이었다. 이후의 시간은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아무것도 안 하는 기술'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다름없는, 생산성 없고 무쓸모한 것들에 시간과 마음을 쏟는 일. 돌이켜보면 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버렸던 것 같다. 정말 많이 걸었다. 퇴근 후 혹은 주말이면 발길 닿는 대로 도시의 곳곳을 세네 시간이고, 한나절이고 걷고 또 걸었다. 길 위에는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도시의 얼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센 강 위로 엎질러진 일몰, 거리에 드리운 싱싱한 마로니에 잎사귀들, 앵발리드 지붕 위에 걸린 반달, 근사한 커브를 돌며 사라지는 6호선 지상철, 개선문 로터리의 진기한 무질서 속 질서, 카페테라스에서 두런대는 다정한 소음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천천히 내 몸에 새겨진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예컨대,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해야 하고, 생산적이거나 합리적이어야 하고, 시간 낭비는 죄악이고, 연령별 과업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변화에 뒤쳐지면 안 된다는 압박들 말이다. 그러자 '내'가 보였다. 형체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고 있는 내가.


파리에서 좋았던 날들은 대부분 여름이었다. 시간 낭비하기 딱 좋은 계절. 그때는 더위를 피해 튈르리 공원에 가는 것이 퇴근 후 일과였다. 비어있는 선배드를 질질 끌고 나무 그늘로 들어가서, 더위를 식히며 해가 지길 기다렸다. 정수리 위에서 이글거리던 태양이 미적미적 엉덩이를 옮기며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파랬던 하늘이 그라데이션을 만들며 조금씩 붉어지고, 오렌지색 구름과 뒤섞이며 꿈같은 풍경을 만들다가, 먹물이 번지듯 서서히 암전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시간이 흐르는 양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금 이 순간, 흐르는 시간 속에 '내'가 있었다. 여름에는 즐거운 무위의 기억이 많다. 한껏 달궈진 오후 다섯 시쯤 아페로(라고 쓰고 낮술이라고 읽는다)를 즐기던 일과, 우거진 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을 오래오래 지켜보던 일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벵센느 숲에서 돗자리도 없이 벌러덩 누워 음악을 듣고, 온갖 여름 과일을 사다가 뒤죽박죽 과일 샐러드를 만들고, 한밤에 인적 드문 생 제르맹 드프레를 산책하고, 선선한 밤바람이 불 때 창문을 열고 편지나 일기를 쓰기도 했다. 모두 영혼을 살 찌운 느슨하고 성긴 시간들이었다.


해외 생활도 어느새 7년 차에 접어들었다. 짧지 않은 이방인 생활을 하며, 무엇이 달라졌는지 가끔 생각한다. 삼십 대가 되었고, 노동자가 되었다는 점 말고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가장 의미 있는 건 역시 잃어버린 무위의 기술을 되찾은 게 아닌가 싶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언어를 빌려 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나 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속도가 아니라 나만의 리듬으로 걷는 법, 오늘 주어진 '나의 현재'를 넘치게 사는 법, '발전'과 '쓸모'가 아니라 '나의 실존'과 '나의 행복'에 귀 기울이는 법을 이제는 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뭐 거의 선수급이다 (지금 이 순간도 책상 앞에 앉아, 세상 가장 쓸데없는 짓을 하며 하루를 통째로 날릴 수 있다. 책상 정리라든지, 편지 쓰기라든지, 시 옮겨 적기라든지, 저녁 메뉴 고민하며 레시피 베끼기라든지). 떡잎부터 달랐던 어린 무위 천재는, 이렇게 무위 장인으로 거듭나며 진짜 '나'를 찾아간다. 나만의 속도로, 게으르고 아름답게.


*당신이 잃어버린 무위의 기술 :  아이티 출신 캐나다 작가 다니 라페리에르(Dany Laferrière)의 단행본 <L'art presque perdu de ne rien faire (2011, Boréal)>에서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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