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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나무 Jul 30. 2020

#45. 한여름의 과일 샐러드

조각조각 뒤섞인 기억의 맛

도시가 여름에 갇혔다.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고, 아직 가야 할 길은 한참 남은 사막의 고속도로처럼. 7월과 8월의 정 가운데에 낀 몬트리올은 생각보다 훨씬 뜨겁고 축축하다. 절절 끓는 폭염, 터질듯한 습도를 못 이기고 쏟아지는 소낙비가 반복되었다. 더위에 취약한 본체로 태어난 까닭도 있지만, 코로나로 바깥 활동이 제한되어서인지, 체감상으로는 겨울보다 더 긴 여름을 나는 느낌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던 "몬트리올 여름, 이렇다더라" (ex. 매일매일이 축제라더라, 퍼레이드가 근사하다더라, 곳곳에서 음악이 들린다더라, 다운타운에 생기가 넘친다더라  등등)는 출처 미상의 카더라 통신이나 전생으로부터 구전된 전설 같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덥고 힘든 와중에 식욕은 착실해서 (살면서 입맛 없거나, 입 짧아 본 적 별로 없음), 집안의 온도나 습도를 높이는 요리는 피하되, 여름이라서 즐길 수 있는 음식을 부지런히 찾아 먹는 중이다.


최근에는 차가운 로제나 달달한 백와인을 자주 마셨다. 맥주는 아주 가끔. 집 근처 수제 맥줏집에서 가벼운 블롱드나 쌉쌀한 아이피에이를 사다 놓고 먹는다. 몬트리올에는 소규모 수제 맥줏집(microbrasserie)이 많은데, 해가 기울어진 오후에 테라스에 앉아 다양한 맥주를 맛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한다. 코로나 이전이라 해본 적은 없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맛있는 빵집을 발견한 후 밥보다 빵을 자주 먹는다. 주로 바게트를 사다가 (잘 만든 바게트에 집착하는 편) 프로슈토나 콩테 치즈를 올려 먹는다. 솔직히 신선한 바게트에는 그냥 버터만 발라도 맛있는데 배만 부르지 않다면 영원히 먹을 수 있다. 차게 식힌 파스타에 토마토와 바질 페스토를 비비거나, 오이와 딜을 잔뜩 썰어 넣은 차지키를 만들어 피타에 올려 먹기도 한다. 귀찮은 날엔 채소 스틱과 칩스를 후무스 같은 딥에 찍어 먹는 것으로 끼니를 대신한다. 늦은 밤 아이스크림을 밥숟갈로 퍼먹으며 넷플릭스를 보거나,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는 것도 여름의 재미다.


자주 만들어 먹는 메뉴는 과일 샐러드다. 과일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덥고 텁텁한 날이면 새콤달콤한 과일이 당긴다. 특정 과일보다는 과일 샐러드가 좋다. 밥 대신 먹기도 하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곁들어 후식으로도 먹는다. 준비도 간편하다. 커다란 유리볼에 껍질을 벗기고 조각낸 과일을 와르르 쏟아 넣고 섞으면 끝이다. 화채처럼 사이다를 부어줄 필요도 없다. 마구 뒤섞다 보면 과육끼리 서로를 짓무르며 유리볼 바닥에 흥건히 주스를 만든다. 이 주스가 과일 샐러드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맛이라고 특정할 수 없지만, 세상의 모든 상큼함이 질서 없이 섞인 아름다운 맛이 난다. 어떤 과일을 어떤 비율로 넣느냐에 따라 주스의 맛이 달라진다는 점도 매력 포인트. 비용 부담도 크지 않다. 싸고 맛있는 제철 과일을 고르면 된다. 오렌지 하나, 백도 하나, 자두 하나, 사과 하나, 망고 하나, 파인애플, 키위 두 개... 과일코너에서 손 닿는 대로 하나씩 담다 보면 바구니가 묵직해져도, 막상 계산대에서는 생각보다 적은 금액이 나와 놀라곤 한다.


나는 과일 샐러드 만드는 과정을 좋아한다. 과일을 씻고, 껍질을 벗길 때 닿는 감각이 좋다. 각기 다른 모양, 크기, 색깔, 향기, 촉감의 과일들이 감각을 풍성하게 깨우는 기분이다. 거칠거칠한 키위의 표면과 싱그러운 초록의 속살, 사각거리는 뽀얀 사과, 탱글탱글한 오렌지의 속살, 저항 없이 뭉클 벗겨지는 망고, 달콤한 과즙을 뚝뚝 떨어뜨리는 파인애플... 이렇게 보고, 냄새를 맡고, 만지다 보면 볼 안 쪽이 뻐근해지면서 혀 아래로 퐁퐁퐁 침이 솟는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면서 입맛이 도는 신호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과일을 만지면서 불안을 잊을 수 있어서다. 팬데믹 이후에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념도 늘고 불안 증세도 심해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지도 않은 미래를 그리고 지우고, 쌓고 무너뜨리던 일상이었다. 하지만 과일에 오롯이 집중하는 순간만큼은 불안하지 않다. 색색의 과일을 소담히 담아 식탁에 앉으면, 내가 나를 아끼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실은, 과일을 만질 때 떠오르는 기억들이 좋다. 억센 파인애플 껍질을 썰 때 나는 옛 동료인 윌리암을 생각한다. 필리핀 운전원이었던 그는 귀신같은 솜씨로 파인애플 눈을 제거하곤 했다. '그때 좀 배워둘 걸' 후회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그와 농담 따먹기를 하고 투닥거렸던 시절을 떠올린다. 대책 없이 무해한 그의 미소와 웃긴 안경과 하늘색 셔츠를 거쳐, 그의 책상 위에 놓인 글루텐 프리 빵과 해피밀 장난감 같은 하찮은 기억에 닿으면, 과일을 썰다가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진다. 새로 모시는 분과는 잘 맞나, 필리핀 아내는 파리로 데려왔을까, 월급은 올랐으려나, 물음은 다른 물음으로 이어지다가, '보고 싶다'로 끝나는 생각의 타래. 사과를 만질 때는 사과 알레르기가 있는 욱이가, 체리 씨앗을 분리할 때는 체리를 좋아하는 Y가, 망고를 만질 때는 파리에서 엄마와 장을 보던 날이, 백도를 만질 때는 서울 생활을 접고 귀향한 어떤 여름이 떠오른다. 그 기억들은 아주 잠시 나를 그 사람에게, 혹은 그 시절로 데려간다. 푸르스트의 마들렌처럼.  


그렇게 완성된 과일 샐러드를 보면, 꼭 수많은 기억들이 하나의 그릇에 담긴 것 같다. 내게 과일 샐러드는 여름 별미이자, 조각조각 뒤섞인 기억의 맛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어떤 시절의 맛이자, 그리운 어떤 사람의 맛이자, 잊히지 않을 어떤 사건의 맛이기도 한, 다채롭고 소중한 한 그릇. 그래서인지 이제는 질릴 법도 한 과일 샐러드를 자꾸만 만들게 된다. 껍질을 바로 치우지 않거나, 설거지를 조금만 미뤄도 날벌레가 꼬여 금세 귀찮아지는 데도 말이다. 여름의 끝은 여전히 멀고, 바람 한 점 없는 숨 막히는 더위와 예기치 않은 소나기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반복될지 모르겠다. 다행한 건, 싱싱하고 달콤한 여름 과일들이 지천이고, 다양한 버전의 과일 샐러드를 몇 번이고 더 만들 수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더 많은 사람과 많은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축제도, 퍼레이드도 없지만, 몬트리올의 여름이 싫지만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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