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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법륜 Dec 11. 2019

"목표 달성에 자꾸 실패해서 고민입니다. 어떡하죠?"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안녕하세요. 오늘은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한국 광물자원공사 대강당에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총 6명이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체력이 약해서 자꾸 실패한다는 질문자와 법륜 스님의 대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십 대 때부터 30대인 지금까지 체력과 정신력에 대해 계속 고민을 해왔어요.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니까 정신력도 안 되는 것 같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자꾸 실패해서 늘 불만스럽습니다. 지금은 2년 반 째 운동을 꾸준히 해왔는데요. 운동을 하니까 오히려 집안일을 할 체력이 더 부족합니다. 체력은 키워야 하니까 운동은 계속하되 집안일은 아예 팽개치고 아이들과 제 공부에 집중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중략)


흥미 있는 것을 하면 좀 나아질까 했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개인적으로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채널 운영은 정말 재미있지만 밤에 편집하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어요. 아이들을 재울 때도 제가 먼저 잠들어버릴 때도 많고요.


그 정도로 저는 체력이 항상 고민입니다. ‘내 체력이 이 정도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들도 이 정도만 해야지’ 이렇게 욕심이라 생각하고 좀 포기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데 제가 자각을 못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첫째, 말이 너무 많아요.” (모두 웃음)


“죄송합니다.” (모두 웃음)



“언제까지 얘기하나 했는데, 그래도 그 정도에서 끝나서 다행이에요. 질문자가 말이 많은 것은 ‘내가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저 인간이 멍청해서 내 말을 못 알아듣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스님이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고 믿으면 말을 길게 하지 않아요. 간단하게 얘기하죠. 스님은 모르면 반드시 왜 그러냐고 다시 질문을 하잖아요. 말을 많이 하는 것만 봐도 질문자가 욕심이 많아요. (모두 웃음)



내가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올림픽 경기에 출전한 어떤 선수가 100미터를 10초에 달리는 모습을 봤다고 합시다.


‘야, 사람이 10초에 100미터를 달릴 수 있구나. 나도 한 번 해봐야지!’


그렇게 해서 1년간 죽기 살기로 노력하면 100미터를 10초에 달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열등한 존재라서 그래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겠죠.”


“노력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노력이 부족한 것 같진 않은데요.”


“그래서 내가 테스트를 해봤다고 합시다. 현재 상태에서 100미터를 달려보니까 25초가 나왔어요. 그럴 때 내가 23초를 목표로 해서 3개월, 즉 100일간 노력을 하면 목표가 달성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그건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것도 안 될 수도 있긴 하지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러면 여기서 질문자가 뭘 알 수 있어요? 질문자의 인생에서 계속 실패를 많이 했다는 건 목표를 너무 높이 설정했다는 뜻일까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까요?”


“목표가 높았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욕심이라는 거예요. 목표를 너무 높이 설정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어요.” (모두 박수)


객석 곳곳에서 탄성과 함께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현재의 자기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 내가 100미터를 25초에 달린다면 25초를 기준으로 조금 개선하는 건 누구나 다 가능해요. 내가 하루에 화를 열 번 낸다면 ‘한 번은 줄여야지’ 이렇게 목표를 잡는 거예요. 지금 하루에 화를 열 번 내는데 아예 안 내겠다는 목표를 잡으니까 죽을 때까지 달성을 못하는 거예요.


‘지금까지는 하루에 화를 열 번 냈지만 한 번은 줄여야지.’


이렇게 한 번 줄이는 것은 자기가 점검해볼 수 있잖아요. 100일쯤 기도를 해보니까 10퍼센트 정도는 줄어들었다고 합시다.


‘야, 나도 되네!’


이게 작은 성공이거든요. ‘그러면 한 번 더 줄여봐야지.’ 이렇게 해서 열 번에서 다시 여덟 번을 목표로 도전하면 또 100일 지났을 때 또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죠. 이렇게 작은 성공을 쌓아야 해요. 그래야 자기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목표를 너무 크게 세워서 욕심을 부리니까 자기가 자기한테 믿음이 없는 거예요. 어떤 목표를 세워봐야 ‘또 안 될 건데 뭐’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질문자에게 지금 욕심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돈을 많이 벌겠다’는 게 욕심이 아니에요. 현실에 맞지 않는 목표를 세우니까 욕심이라고 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를 하고 싶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고 다 욕심은 아니에요. 동시에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면 방법을 모색해야죠. 예를 들어 청소는 청소도구를 도입해서 시간을 줄일 수 있죠. 아이들과 같이 있을 때는 즐겁게 보내더라도 아이에게 지나친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방법이에요.


아이한테 짜증 내면서 맛있는 걸 해줘봐야 하나도 도움이 안 돼요. 짜증을 안 내고 옷을 한 번 덜 갈아입히든지, 짜증을 안 내고 방 청소를 한 번 덜 해주든지, 짜증을 안 내고 반찬을 대충 해주는 게 아이한테는 훨씬 이익이에요. 아이는 엄마가 짜증내고 화내는 데서 상처를 입지, 밥을 조금 적게 해 줬다고 상처 입는 건 아니에요. 아예 밥을 안 주면 몰라도요.


그런데 여러분은 거꾸로 하죠. 이걸 경상도 사투리로 ‘디비 쫀다’라고 해요. 여러분은 인생을 디비 쪼는 거예요. 아이한테 잘해주려고 엄청나게 애를 쓰면서도 정작 아이한테 엄청나게 짜증을 냅니다. 그래서 옷을 자주 빨아주면서 짜증내고, 방 청소해주고 짜증내고, 반찬 하나 더 해주면서 짜증 내요. (모두 웃음) 그러니 나는 나대로 힘들고 애한테는 나쁜 영향을 주는 거예요. 엄마가 행복하게 살면 아이들은 저절로 행복해집니다.


너무 이것저것 하겠다고 목표에 욕심내지 마세요. 이걸 하고 싶다면 딴 걸 좀 대충 해야 해요.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기는 불가능해요. 제가 여러분과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건 먹는 것이며 입는 것에 신경을 안 쓰고, 부인이니 자식이니 가족에 신경을 안 쓰고, 돈 버는 데 별로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에요. 자는 것마저도 별로 신경 안 써요. 자면 자고, 시간 나면 아무 데나 앉아서 졸고, 밤이라도 일이 있으면 안 자고요. 그래서 거의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잡니다. 그렇게 생활하니까 시간이 많이 남는 거예요.


질문자도 그렇게 다른 걸 절약해서 시간을 원하는 쪽에 투여하든지, 안 그러면 일을 좀 적게 벌리든지 해야죠. 이렇게 얘기하면 또 이렇게 말할 거예요.


‘스님은 일 많이 벌리잖아요!’


대신 저는 딴 걸 많이 안 하잖아요. 체력과 정신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가 아니에요.”



“스님, 그리고 제가 아이들이 어릴 때 화를 많이 냈는데, 아이들이 지금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이 됐어요. 제가 스님 유튜브 법문을 정말 많이 보면서 엄마로서 좀 달라졌거든요. 그런데도...”


“그래도 나중에 사춘기 넘어가면 저항을 할 거예요.”


“저항하나요?”


“당연하죠. (모두 웃음) 경전에 이렇게 쓰여 있어요.


‘지은 인연의 과보는 피할 수가 없다. 깊은 산속, 깊은 바닷속에 숨는다 하더라도.’


내가 지은 인연에 대해 알고 있으면 문제가 안 돼요. 애들이 사춘기 돼서 막 저항하고 난동을 피워도 빙긋이 웃는 거예요. ‘아, 그래도 내가 너한테 심어준 것에 비해서는 효과가 적구나’ 하고요. (모두 웃음)



그러면 ‘요게 어디 까불어!’ 이런 마음이 없어요. ‘아이고, 엄마가 미안하다’ 이러고 넘어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애들이 아무리 문제를 일으켜도 문제 자체가 안 됩니다. 내가 이미 딱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자기가 지은 인연을 모르면 ‘착실한 애가 갑자기 왜 그러느냐, 내가 너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떻게 이러느냐’ 이렇게 해서 싸움이 계속 커집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 싸움이 안 돼요. 애가 뭐라고 저항을 해도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아이고, 미안하다. 네가 어릴 때 엄마가 잘못해서 씨앗을 심어놓은 게 드디어 싹이 나는구나. 그런데 나는 한 100의 과보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50밖에 안 되네. 이 정도야 받아내야지.’


이렇게 기꺼이 받아버리면 아무 문제가 안 돼요. 과보가 없는 게 아니라, 과보가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받을 준비가 딱 있으니까요.


돈 빌린 것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한테 돈을 빌려준 상대가 빚 받으러 와서 돈 달라고 하면 기꺼이 주잖아요. 옛날에 빌렸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처럼, 내가 이미 애한테서 돈을 빌렸으니까 애가 달라고 하면 이자 쳐서 주면 돼요.


그런 마음을 딱 가지면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넘어지면 일어나야지, 왜 넘어졌는지 고민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과보를 받을 것이라고 딱 예측하고 있어야죠. 그런데 내 생각보다 저항이 좀 적으면 입에 미소를 지어야죠. ‘그래도 교회나 절에 다녔다고 좀 봐주나 보다’ 이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아이들도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아이고, 내가 너한테 끼친 나쁜 영향에 비하면 네가 참 잘 자라줘서 고맙다. 엄마는 100만 원 빚 갚으려고 준비했는데 50만 원밖에 안 달라고 하니까 고마워.’


이런 마음을 내면 앞으로 애 키우는 데 아무것도 문제가 안 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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