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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Jun 05. 2024

연말과 글쓰기

저의 일기를 정리하고 공개합니다 2023년 12월

2023.12.06. 수요일



완연한 겨울이 되었다, 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호랑이 발바닥 슬리퍼를 꺼내 신었다.



코골이 방지 입막음 스티커를 구겨서 손에 꼭 쥔채 깨어났다. 새 코뚜레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스티커랑 코뚜레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와서 떼어낸 기억이 있는데, 그건 꿈이었다.



남편을 역에 데려다주러 지하주차장으로 함께 내려갔는데 저 멀리서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14층 아주머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주머니가 인사를 하지 않길래 자연스레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돌리고, 차에 탔다.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옆집 아주머니 아니지?" "아니지." 남편이 어이없어 했다. "완전 다르게 생겼잖아?" 나는 답했다. "마르고 안경 썼잖아." 남편은 이제 나를 가엽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니, 나도 알아보고 싶다고. 나도 불편하다고!! 다들 알아야 한다. 이름과 얼굴을 못 외우는 내가 교직생활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허리 때문에 쉬던 필라테스를 갔다. 너무 졸렸다. 보통 5분 정도하면 깨는데 50분 내내 반쯤 자면서 했다. 어제 물놀이를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 운동이 힘들지 않아서일까. 신입이 있어서 강도를 조절하셨는지 땀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귀가했다. 역시나 잠들었고, 시간이 늦어 원래 가려던 브런치 카페에 가지 못했다. 게으른 덕분에 돈을 아꼈다고 정신승리.




회색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 아래를 지나 글쓰기 교실에 간다. 오늘 수업은 올까말까 고민을 좀 했었다. 집에 누워있고 싶기도 했고, 문집 작업이 끝난 후의 수업은 좀 흐리멍덩하게 지나가기 마련이라서 그랬다. 역시나 글감 모으기와 글쓰기의 치료효과를 빙자한 연말 추억나누기로 진행되었다. 9명 중 6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2기에 새롭게 들어온 분들은 출석률이 좀 좋지 않다. 수업이든 모임이든 결석자가 늘어나면 분위기가 처지게 되는데...(라며 빠질 생각을 했었다.)



ㄱ 선생님이 클래식 연주회에 갔다가 화장실에서 종이타월 2장 쓴 일로 낯선 이에게 지적받은 이야기, 그걸로 글을 쓴 이야기를 하셨다. 다들 그 지적한 사람이 지나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1장만 쓰세요.' 학교에서 착하디 착한 ㅇ선생님이 종이타월을 늘 2장 쓴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어찌나 놀랬던지(?). 그런데 방금 남편이 지나가다가 어깨 너머로 일기를 보더니 자기도 2장 쓴다고 그래서 더 더 더 충격받았다. 이제부터 1장만 쓰기로 그에게 다짐을 받았다.



ㄱ선생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이시고 암투병 중이시다. 현재 가장 궁금한 일로 '내년 벚꽃을 볼 수 있을까'를 꼽으셨다. 안색도 좋으시고 흰머리를 멋지게 정리하시고 신사처럼 오시는 그분이 위태한 상태라는 것은 언제나 믿기질 않는다. 아내 분이 말하셨단다. "죽으면 쫓아가서 죽일 거야." 


그 외에도 올해는 슬픈 일이 많았다며 장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그때 나온 "우리 부부는 고아가 되었죠."가 가슴 속에 묵직하게 남았다. ㄱ선생님이 돌아가시면 그분의 부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고아인데 남편도 없이.


ㅈ선생님이 7월에 시니어배우 오디션에 합격하셨단다. 50대 초반으로 알고 있는데 운동도 글쓰기도 연기도 정력적이시다. ㅂ선생님과 강사님의 열정어린 이야기도 들었다. 다들 어려서부터 '누워있기'가 소원이던 나와 딴판이다. 


예전에는 나도 저래야 하는데, 라는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제는 그딴 것도 없다! 그냥 숨 쉬고 누워있는 걸로 기특해하며 할 수 있을 때 근근히 일하련다.



ㅇ선생님이 올해도 귤을 보내줄테니 주소가 바뀌었는지 알려달라고 하셨다. 올해도 "안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말하면 실례겠지. 2인 가정인데 귤을 너무 큰 박스로 보내주셔서 나눠주고 먹고 나눠주고 먹어도 끝이 없었다. 그리고 답례품도 항상 고민된다. 어느 해부터 갑자기 왜 귤을 주시는지 모르겠다. 그만...그만...



고양이를 만지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금단증상이 올 것 같다. 집에 돌아올 때마다 "엄마가 돌아왔는데 얼굴도 안 내미니!"라고 외치나 공허한 울림이다. 요망한 코타츠와 괘씸한 고양이들.



저녁에 남편을 마중가며 현관 앞에 있는 고구마박스에 눈길이 갔다. 밤을 다 처리했으니 내일 저녁은 이거다. 삼시세끼를 준비하며 이제는 알 수 있다. 가끔씩 우리가 특식이라고 생각했던 감자나 고구마를 쪄줄 때 엄마가 느꼈을 감정을. 뭔가 부실하게 밥을 차리는 것 같다는 죄책감, 약간에 본격적인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느끼는 행복감 가득. 


아파트에 도착해 시동을 끄자 남편이 눈을 감으라 했다. 눈을 감고 손을 내밀고 기다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손에 올라왔다. 창억떡집과 콜라보한 '호박인절미소보로'였다! GS편의점 신상이란다. 두근두근, 아침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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