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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폼폼 Oct 11. 2024

행복할 때는 그 시간이 행복인 줄 몰라

서울에 왔고, 추운 날을 그리워하는 나를 만났다.

 그날은 요즘 힙하다는 을지로 또는 신당동에 가서 신나게 놀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서울에서 수없이 나의 발이 되어 주었던 익숙한 103번 버스에 올라탔고, 무심코 노선도를 바라보았다. '길음뉴타운', 낯이 익은 그 다섯 글자. 나의 자랑스러움과 외로움, 뿌듯함과 슬픔, 파릇한 시간과 추웠던 날이 뒤섞인 그 공간과 그 길을 지나고 있자니 지난 기억들이 재생되었다. 너무 고단한 날이면 나를 위한 사치로서 길음역 근처 시장에서 큰맘 먹고 사 먹었던 야채 곱창 볶음. 터덜터덜 올라갔던 길음역 10번 출구의 계단. 그 계단을 올라 마주하게 되는 습하고 어둡던 역 근처의 공기. 


  마음의 준비 없이 시작한 타지 생활의 시린 감정들이 점차 익숙해질 무렵, 그 시간과 공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었다. 월곡동 이마트와 위아래로 이웃하고 있는 달빛마루 도서관에 임용 공부를 하러 다니면서 언젠간 이 동네를, 이 도시를 벗어나리라 수없이 다짐했고, 몇 년 뒤 이 날을 그리워하고 있을 나를 몇 번이고 그렸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느낄 그리움은 그다지 진심 어린 것이 아니었다. 내가 벗어나고 싶은 건 그 동네와 도시라기보단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리워할 만한 것이라기엔 매년 찾아오는 서울의 겨울은 내겐 너무 추웠다.


  서울을 떠난 그 후로 종종 서울에 오곤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서울에서 보냈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 나를 만난다. 지난날의 나는 마냥 아프고 슬프지도 않았지만, 마냥 외로웠다. 본가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그 길에 번을 울었다. 서울에 다다른 기차가 한강 위를 힘차게 지날 때면 또 울었다. 기차에서 쏟아지는 사람들로 서울역은 북적거렸지만 가족이 있던 도시에 비해 유난히 공기가 차게 느껴졌다. 확실히, 아무래도, 그리울 가능성이 적은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리워하고 있다. 아담한 방에서 일기장에 기대 외로움을 이겨내려 애쓰면서도 그토록 그렸던 서울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눈을 반짝이던 나를, 대학이라는 새로운 출발점에서 다양한 이들과 만나는 것을 설레어하며 잘 적응하고 어울리려 노력하던 나를, 용돈이 부족해 삼각김밥을 집었다가 내려놓고 돈을 덜 쓰고 배부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나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사람들로부터 정을 느끼고 계산적인 마음 없이 근무시간 외에도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즐거웠던 나를, 돌아보면 한없이 부족했던 사람임에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나를, 큰 이모네 집에 놀러 가서 엄마와 닮은 따스함을 느끼며 흐뭇하게 돌아오던 나를, 졸업할 무렵 방황의 끝자락에 매달려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나를, 학원에서 일하며 나의 일을 제대로 잘 해내고 싶었던 나를, 뒤늦게 찾은 나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만이 나를 살아가게 했던 날을,


  돌아보면 다 '행복'이라 부를 만한 날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차근히 더듬어 보니,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는 행복의 사전적 정의에 제법 어울리날들. 지금의 기준과 눈으로 바라봤을 때 부족했을지언정 나는 나의 생활에서 순간순간 나름의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살았었다. 내가 서울에 홀로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경험, 만날 수 있었던 사람, 느낄 수 있던 감정들은 돌아보니 그때에만, '그때라서'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순간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볼 줄 몰라서 알지 못했을 뿐.


  아마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시간들도, 마주하는 경험들도, 만나고 있는 사람들도, 나를 스쳐가는 수많은 감정들도 다 '행복'이라 부를 만한 것들 일지 모른다. 먼 훗날 나는 또 지금을 그리며 역시나 행복이었다고 말하고 있을 테지. 지난날들을 그리워하며, 지나 보니 그 순간들이 행복이었다는 글을 쓰는 오늘조차 나는 지금 내가 머무는 공간과 시간이 행복인 줄 모른 채 습관처럼 아쉬움을 내뱉었다. 왜 행복할 때는 그 시간이 행복인 줄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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