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히지 않는 그 날
오래된 유리 등에서 노란 불빛이 작게 내려오다 흩어졌다. 보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안정된다.
‘저기 저런 전등이 있어나...’ 이 집을 드나든 지 벌써 몇 년인데 저 전등이 켜질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때 어머님이 부스스 걸어 나오시며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뜨셨다.
“ 아직도 못 자는 거야? 윤서 열은 좀 괜찮니?”
“ 어머니 나오셨어요? 불 켜져 있어서 못 주무셨죠? 윤서는 열이 좀 떨어진 거 같아요, 걱정 말고 주무세요. 저도 곧 잘게요.”
올해 들어 가장 덥다고 뉴스에서 연신 난리였던 숨이 턱턱 막히던 그 여름밤. 우리는 시댁 거실로 피난을 왔다. 하필이면 우리의 작고 소중한 에어컨이 고장이 나서 집안에 있기만 해도 찜통 안에 있는 만두가 된 기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열이 나고 있었다. 아뿔싸, 방법이 없다. 피난을 가자.
다행히 가까운 거리에 시부모님이 계셨다. 우리 에어컨보다 훨씬 크고 세련된 새 제품에서는 안정적으로 쾌적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다. 컨디션 난조였던 아이는 저녁에 잠옷 차림으로 할머니 댁에 놀러 오니 소풍을 온 것처럼 신난 상태였다. 시원한 거실에서 뽀송한 이불에 뒹굴뒹굴하더니 열도 내려가고 눈꺼풀도 내려갔다.
한 손은 아이의 이마를 짚고 한 손은 노트북의 마우스를 움직인다.
내일 오전에 있을 발표 자료를 아직도 수정하고 있다. 발표가 끝나면 Q&A 시간이 있으므로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준비해야 했다. 작게 읊조리는 수준으로 발표 자료를 읽어본다. 3분 안에 우리의 사업을 매력적으로 어필해야 한다. 이제 세상에 갓 태어난 사업은 갓난아기와 같다. 끊임없이 돌봐줘야 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서 순간 결정을 내려야 한다. 양육자가 없으면 살아있을 수 없다. 가지고 있는 리스크보다 앞으로의 미래가치를 더 신중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제 막 태어났으니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그건 심사위원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솔직하게 지금 가지고 있는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며 성장시킬지 3분의 발표와 5분의 질문시간에 답변해야했다. 내가 봐도 부족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면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잠이 든 아이의 얼굴은 갓난아이 같다. 몇 번이고 읽고 고쳐가며 대본을 완성하고 타이머를 맞추어 연습하니 3분 안에 딱 들어온다.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면 한숨이 쉬어졌지만 우리 말고 다른 팀들도 갓 태어난 사업을 들고 왔을 테니 다 비슷할 거라며 스스로 위로했다.
발표 시간보다 1시간 정도 일찍 도착해서 준비를 했다. 거의 다 외운 대본은 하룻밤 사이에 낡아져있다. 그때 같이 준비하던 동료가 던진 예상 질문에 머리가 하해 졌다. 아.. 이거 생각했었는데 왜 예상 질문에 안 들어가 있지? 당연히 답변도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서둘러 자료를 뒤져본다. 마음이 요동친다.
카페인 때문인지 잠을 설쳐서인지 심장이 콩콩거렸다. 어느 정도 안정되게 준비가 끝났다 싶었는데 생각지 못한 시험문제를 받아든 것처럼 당황스러웠다. 잘 끝낼 수 있을까? 바보같이 하면 어떡하지? 오만 생각이 겨울바다 파도처럼 몰아쳐왔다. 잠시 노트북에서 멀어진다. 길게 심호흡을 한다.
그이와 통화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나 마음을 내 목소리로 내보내면 그건 확정된 사실이 될 것 같았다. 내 목소리로 나의 나약함을 고백하며 통화하기에는 시간이 없다. 짧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곧 시작인데 머리가 하해지고 걱정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노트북 오른쪽 하단에 그이로부터 온 답장 팝업이 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울컥한 마음에 겨우 흐르려는 것을 붙잡고 눈알에 꾹꾹 눌러 담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구체적인 답변 조언도 지금 나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조차 몰랐던 나의 마음인데 그이는 답을 알고 있었다. 일순간 마음이 평온해졌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이라는 문구에 마음이 풀어져버렸다. 끝이 창대할지 안할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나의 시작이 미약하다 그렇지만’ 이 말이 나를 위로했다. 익숙했던 저 문구가 나에게 콕 박힌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문장 하나가 홍해를 갈랐다. 겨울바다가 잠잠해졌다.
엄마가 된 것도, 나의 아이디어로 사업을 만든 것도 다 처음이었다. 프로처럼 보이고 싶은데 매 순간 어설펐고 초보 느낌을 스스로 제일 견디기 어려워했다. 이제 세상에 좀 익숙해지고 사람과의 관계나 회사도 예상이 되는 삼십 대 중반이라 생각했는데, 아이를 낳아 키우고 새로운 사업을 만드니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렸다. 이제껏 경험해보 지 못한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다들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 더 놀랐다. 어설픈 책임감으로 버티던 마음은 ‘시작은 미약하다’는 말에 단박에 위로받고 안심되었다.
그후로도 나는 어설픈 나를 마주 볼 때면 그때 오른쪽 하단 귀퉁이에 떠오르던 팝업창을 생각한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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