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로참고극장 <부캐대전 스토리> ③ 자아발굴단
삼일로창고극장의 풍경이 또 달라졌다. 첫째날은 우드 카빙 공방 같았고, 둘째날은 헬스장 같았는데, 이번엔 연구실 같은 풍경이다. 책상 위 파일엔 질문과 칸으로 빼곡한 종이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고, 스크린 위에 원색의 알 수 없는 그림들이 띄워져 있었다.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다. 스스로를 '발굴단장'이라 소개한 장비치 작가가 '함께 자아를 발굴해보자'고 제안했다. 자아를 발굴한다니? 자아를 어디서 어떻게 발굴하지?
모두에게 이상한 미션이 주어졌다. 삼일로창고극장 주변 명동의 거리를 함께 걷되, 서로 대화하지 말 것. 자기만의 감각에 집중해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 나를 자극하는 시각정보들을 채집할 것. 돌아와서 자기 마음이 그려내는 지도를 자유롭게 그릴 것. 극장을 나서기 전, 장비치 작가는 명동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들려 주었다. 과거 예술가들의 아지트들이 곳곳에 있던 동네, 명동.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 공간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있을까? 흥미가 돋았다.
명동을 돌고 돌아오니 조금 막막해졌다. '내 마음을 그리라니, 어떻게 그려야 돼?' 정답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흘끗흘끗,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나 보게 된다. '다들 똑같은 곳을 걷고 왔으니까, 똑같이 그릴텐데. 뭐가 새로운 게 있을까? 이걸로 자아가 발굴된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다 생각나는 것들을 종이 위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뭐가 있더라.
오래된 간판도 건물도 몇 개 없었지.
손에 꼽을 정도였어.
그 많던 다방과 예술공간들은 어디로 간걸까.
왜 이 거리엔 옛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아쉽다.
이런 걸 아쉬워하는 건 나뿐인가.
호텔 로비에 있던 그 이상한 로봇, 정말 이상했어.
이야기가 없는 거리는 재미가 없다.
차라리 건너편 을지로를 구경하러 가고 싶네.
저 건물 안에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 끄적끄적.
서로의 작업물을 공유하는 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다들 똑같겠지'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사용하는 재료도, 표현의 방식도, 관점도 누구 하나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길을 걸었음에도 서로 바라보는 것이 어쩜 이렇게 다른지. '명동'이라는 지역의 역사와 이야기, 옛 흔적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정말 나뿐이라는 사실이 놀라웠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주변의 감각들을 포착하고 표현해내는 사람들이 신선했다. 이럴 때마다 새삼 느낀다. 내가 꽤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걸... 우리는 그렇게 공공공간 속에서 주운 '나'에 대한 힌트들을 기록하고, 그렇게 발견한 자아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오래된 이야기를 수집하는 나.
모험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
시끄러운 소음을 싫어하는 나.
규칙에서 벗어나 나만의 속도로 걷는 나 …
나에게 나는 평범하다. 매일 하는 생각, 매일 보는 모습. 그닥 특별할 것 없다. 내가 신기하게 느끼고 독특하다 느낀 저 사람들 또한 스스로는 평범하다 여겼으려나. 나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순간이면 나도 몰랐던 나의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얼마 전 읽은 문장이 떠올랐다. <데미안> 속의 한 구절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저 자신일 뿐만 아니라 일회적이고, 아주 특별하고,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며 주목할 만한 존재다. 세계의 여러 현상이 그곳에서 오직 한번 서로 교차되며,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는 하나의 점인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은, 어떻든 살아가면서 자연의 뜻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이로우며 충분히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장비치 작가는 어쩌다 마음의 지도를 그리고,
마음의 지도를 그리는 일을 가이드하게 되었을까?
장비치 작가는 '공공(public)의 영역'과 '사적인(private) 영역'이 맞닿는 지점을 탐구하기를 즐기며, 그 과정에서 얻은 영감으로 사진, 전시, 설치, 워크숍 등 다양한 작업을 한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프리블릭 아트(priblic art)'라 명명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익숙한 장르가 아니기에, 어떤 모양의 일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스스로도 찾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일을 스스로 선언하고 타인에게도 공유하는 일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비단 '프리블릭 아트'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우리의 일과 정체성은 분명 나의 것이지만, 나만의 것이 아니기도 하니까.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가끔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스스로의 일을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부터인가 마음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 '나'에 대한 힌트를 성실하게 주울 것
- 수많은 정보와 자극이 넘치는 도시공간 속에서 오로지 나의 감각에만 집중할 것
- 그렇게 그러모은 힌트 속에서 발견한 '나'에게 내 방식대로 이름을 붙여줄 것
- 다양한 '나' 사이에 우열을 두지 않고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존중할 것
그러고 보니 워크숍의 그라운드 룰이 작가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방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공간을 걷고도 다 다른 모양의 지도를 그려낸 것에서 알 수 있듯, 내 마음의 지도는 결국 내 방식대로 그릴 수밖에 없다. 재료도, 색깔도, 방식도, 담아내는 풍경도 전부 다 나의 몫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삼일로창고극장 ‘창고개방’ 프로그램 중 ‘부캐대전’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www.samilro.com
스토리 디렉터 / 김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