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해리 Nov 26. 2021

[부캐대전] 오로지 하나뿐인,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삼일로창고극장 <부캐대전> 스토리 ② 어쩌다 극장에서 트레이닝

“포기하지 마세요!”


후들후들 다리가 떨려온다. 자비 없는 트레이너가 눈을 크게 뜨고 파이팅을 외치는 이곳은 헬스장이 아니고 극장이다. 아니, 극장이 맞는걸까. 호흡이 가빠오고 시야가 흐려진다. 혼란스럽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어쩌다 극장에서 트레이닝


트레이너이자 배우, 퍼포머로 살고 있는 김진솔 작가와 함께하는 워크숍에 왔다. 지난번엔 내내 나무를 깎았는데 이번에는 트레이닝이라니. 애초에 이상하고 귀여운 워크숍을 컨셉으로 기획한 게 맞긴 한데, 분명히 나도 같이 기획한 건데… 정말로 이상해서 부들거리며 스쿼트를 하다말고 웃음이 나온다.



내 근육에 집중하세요.
이곳의 음악, 사람들,
다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요.

이제 진지하게 할게요.

"여러분, 오늘 이거 하러 온 거잖아요.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아요.
여기까지 왔으니까, 해 보는 거예요."



이 사람, 진심이다. 웃음기가 쏙 들어갔다. 그가 말하는대로,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해보기 시작했다. 헉, 내 몸에 근육이 있었구나. 흐헉, 내가 이렇게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살았구나.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트레이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부캐대전>은 언제나 내 예상을 벗어난다. 그는 이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몸을 만나는' 경험을 함께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회적인 영역, 직업적인 영역의 정체성과는 별개인 '나'를 만나보는 감각, 이것도 '나'라는 감각을  나누고 싶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뿐인 김진솔


김진솔 작가는 자신을 '헬스장에서는 트레이너, 극장에서는 배우, 거리에서는 퍼포머입니다. 집에서는 딸이고, 운전할 때는 운전자이고요. 그래서 저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명명하기가 어려워요. 하루에도 스위치를 바꾸듯 3~4개의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데요. 하나의 정체성이 또 다른 정체성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고, 결국 그 정체성들이 서로 이어지며 오로지 하나뿐인 '김진솔'이라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2021 삼일로창고극장 ‘창고개방’ (촬영: 이강물)


오로지 하나뿐인 김진솔. 그 말이 참 멋졌다. 처음엔 그도 운동 일과 배우 일을 별개의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몸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스스로를 보며 '너, 배우 하겠다면서 이걸 하고 있는 게 맞아?'라며 자신을 질책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걸 하게 됐잖아요. 다른 일이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생기기도 해요. 살아오면서 해온 모든 것들이 저에게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그렇다. 나도 내가 이곳저곳에 찍어온 점들이, 의외의 지점에서 연결되는 경험을 한 적이 많았다. '달라서 새로운 게 생긴다'는 말이, 굵고 뚜렷한 선을 그어온 사람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작게 느끼던 요즘의 나에게도 위안이 되었다.




정체성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


김진솔 작가의 이야기 덕분일까, 극장에서 다같이 트레이닝을 했다는 이상한 전우애(?) 때문일까. 워크숍에 참석한 사람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모여 앉아 솔직한 고백들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내 몸도 나를 이루는 '정체성' 중 한 부분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내 '몸'을 감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나한테 몸이라는 게 있었구나' (웃음) 누워서 심장을 느껴보라고 했을 때 심장이 뛰는 걸 느껴본 게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의미에서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계기였어요."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은 저한테도 항상 고민이에요. 정의한다는 것이 어쩌면 위험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언제 바뀔지 모르는데, '난 이거야' 라고 선언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냥 지금은 A, 하다 보니 B, 또는 A-1 일 수도 있는건데 그게 왜 그렇게 부담스러웠을까요. '지금은 이거', '다음은 이거'일 수 있는데 하나로 결정지어야 할 것 같았나봐요."


"전 오늘, 울컥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운동? 힘들지 않을까? 집에 못 가면 어떡하지? 이렇게만 생각했는데요. '내 몸에 집중하고 근육 하나하나에 집중해'라는 말에 울컥했어요.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나에게 이렇게 집중한 적이 있었나?', 나는 뭘 위해 살아왔고,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정체성이라는 단어의 정의도 잘 모르겠고, 나는 나인데 진짜 나는 없었던 것 같아요. 나는 어떻게 보일까, 해야 하니까,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해왔던 게 많은데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저도 요즘 도대체 내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처음 예술을 시작한 건 남을 위해서 한 게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이러면 되나? 저러면 되나? 타인의 시선에 내 정체성이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요즘 정말 다양한 일을 하면서, 동료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서로 지치면 끌어줄 수 있는 관계요. 사실 그만 하고 싶었는데 앞에 있는 저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버티게 되더라고요. (웃음) 그렇게 집중하는 게 눈물이 났어요. 예술이든 운동이든 나를 위해 하는 것이잖아요. 목적이 없는 나의 이름을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 확신을 얻어가요."





내가 하는 것이 나만의 '정답'


"저는 트레이너이자, 배우이고, 창작자이고,  쓰는 사람인데요. 트레이닝으로 정체성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있을까, '무엇을   있을까' 진짜 많이 생각했어요. '모르겠다, 그냥 운동을 하러 오자.' 했어요. 정답이 없는 일이잖아요. ' 일은 내가 처음이다. 그러니까 오늘 내가 하는  정답이다.' 그랬어요."


서로 다른 영역을 오가며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쪽과 저쪽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연결한다. 운동하는 사람과 예술하는 사람 ─ 김진솔 작가는 결국 서로 다른 정체성을 혼합해 지금 이렇게 이상한, 김진솔밖에 할 수 없는 워크숍을 만들었다.


"저는 사실 몽상가예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데요. 헬스장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잖아요. 청승맞다고 느낄 수도 있고요. 그래서 회원님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어요. 그런데 여기 오면, 판이 깔려 있으니까, 할 수 있잖아요.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게 행복하고 감사했어요. 예술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오늘 예술한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김진솔 작가의 말에서 나는 내가 좋아했던 예술의 모양을 다시 발견했다. 그렇지. 이 워크숍은 어떤 정답을 주고 깨우침을 주기 위한 게 아니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기 위한 자리였지. 좋은 이야기는 사람들을 수다쟁이로 만든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진다. 그걸 새삼 깨닫는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라면 극장에서 트레이닝을 하든, 나무를 깎든, 그 자체로 예술이라는 것. 또 나라는 사람 역시 이 일을 하든 저 일을 하든, 그 자체로 '나'라는 것. 다른 사람의 말과 시선으로 나를 재단할 필요 없다는 것. 나는 오로지 하나뿐인 나이고,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히 있으니까. 조금 느리더라도. 세상의 속도와는 다를지라도.




삼일로창고극장 ‘창고개방’ 프로그램 중 ‘부캐대전’의 일환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www.samilro.com


스토리 디렉터 / 김해리



작가의 이전글 [부캐대전] '나다운' 일이란 무엇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