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참 커리어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과방에서 매일 졸업논문과 씨름하던 언니가 있었다. 자연스레 과방에 갈 때마다 한두마디씩 담소를 나누곤 했다. 어느날 언니가 툭, 이런 말을 던졌다.
"해리 너는 기획을 잘하잖아. 혼자서 미디어 운영도 하고 말야."
"저는 그런 게 좋아서 여기 왔거든요. 너무 재밌어요."
"진짜? 좋겠다! 계획 짜구, 컨셉 뽑구, 글 쓰구, 그런 거 나는 너무 하기 싫거든. 그거 되게 대단한거야."
언니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이 대화가 엄청난 힌트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이 세계에서는 계획적으로 일을 꾸미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기획'이라는 일의 특성을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문화예술이 너무 좋아 다른 일을 선택할 생각이 없고, 특정 장르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서 자연스레 기획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오히려 반대였다. 기획하는 일이 너무 좋았다. 어떤 아이디어를 머릿속으로 굴려 계획적으로 추진해 현실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기획이 좋은데, 무엇을 기획하면서 살아갈까.'하고 생각해봤을 때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 가장 즐겁고 행복했기에 이 분야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나는 예술 지식이 너무 부족해.'
'나는 예술을 배운 적이 없어서 예술계의 언어와 시스템을 잘 몰라.'
'다들 한 장르에 대한 깊은 전문성이 있는데 나는 그런 건 자신없어.'
학교에 입학하고부터는 계속 나의 부족한 점을 찾아내며 주눅 들었었는데, 뒤집어 생각해보니 나는 한 가지 장르에 매이지 않고 여러 장르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업계에서 통용되는 관례나 원칙을 잘 모른다는 점도 오히려 새로운 발상이나 시도를 쉽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그렇게 나의 다른 특성을 바라봐 주기보다 부족한 것을 채워 넣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려고 애썼던 건 아닐까?
동료의 잠재력을 찾아내 보려는 태도의 가치를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인위적으로 상처를 입혀야 누군가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낡은 생각일 수 있다. 성장은 자신을 알게 되는 체험인데, 그가 제 작품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자기도 잘 아는’ 단점이 아니라 ‘자기는 잘 모르는’ 장점이다. 예술가로 성장한다는 것은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자신을 세우는 일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형철, [신형철의 뉘앙스] 나쁜 비판의 잉여 쾌락, 경향신문
최근 이 글을 읽고, 위 문장을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 주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단점을 하나씩 없애서 흠 없이 무난한 상태로 변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와도 다른 또렷한 장점 하나 위에 너를 세우라'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방식으로 '나'를 성장시키려고 하지 말라고.
"네.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건 다 포기해요. 세상에 잘하는 사람은 너무 많고, 잘하지 못하면 고통받으니 신속하게 단념하는 거죠. 돈에 욕심을 안 부리는 건 재력에 두각을 나타낼 자신이 없어서예요. 저는 가창력에도 두각을 나타낼 수 없어요. 그렇게 하나둘 포기하다 보면 알게 돼요. 최고가 없으면서 내가 1등 할 수 있는 분야는 개성이라는 걸. 개성을 살리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겠구나! 나 혼자 게임 해서 1등을 해야겠구나! 이를테면 축구가 아니라 혼자 뛰는 달리기를 선택하는 거죠."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행복하려면, 끝없이 포기에 성공해야" 장기하의 단념의 미학
장기하의 인터뷰를 보고는 재치있는 답변에 웃음이 나왔다. '그건 니 생각이고'를 노래하며 '그냥 니 갈 길 가라'던 모습도 떠올랐다.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건 포기한다'니. 그걸 '단념의 미학'이라 표현한 김지수 기자님의 시선도 너무 좋다.
어쩌면 그때의 나도 단념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두각을 나타낼 자신이 없는 영역은 빠르게 포기했다. 경쟁해서 이기는 것은 내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그 대신 내가 발견한 단서, '기획'이라는 키워드를 더 뾰족하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특정 장르 중심이 아닌 기획이 중심이 되는 조직에서 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프린지'였다. 당시 나는 예술가들이 독립적으로 만들어내는 작고 이상한 작업들을 보러 다니는 것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런 작업들을 '독립예술'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프린지는 예술가들의 실험적인 작업, 독립예술을 위한 일을 하는 조직이었다.
프린지의 주요한 프로젝트는 매년 여름마다 개최하는 독립예술축제,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었다. 프린지는 꽤 역사가 깊은 축제였다. 1998년 당시 20대를 지나고 있던 한 무리의 예술가들이 모여 권위적인 순수예술과 상업적인 대중문화로 양분화되어 있는 문화예술계와는 다른 목소리와 존재를 알리고자 21일 동안 대학로를 점령하고 축제를 열었던 ‘독립예술제’가 그 시작이었다. 이후 연례행사로 자리매김한 독립예술제는 2002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로 축제 명칭을 변경하고 홍대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축제를 개최해 왔다.
프린지(Fringe)는 사전적으로 '변방' 혹은 '주변부'를 뜻하는 단어다. 1947년,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초청받지 못한 8개의 젊은 예술단체들이 축제가 열리는 도시 주변부의 빈 창고, 지하실, 거리 등의 공간에서 자신들의 공연을 선보였던 것에서 '프린지페스티벌'이 시작됐다. 즉, 프린지페스티벌은 특정한 방식의 예술축제를 통칭하는 개념어로 서울을 제외하고도 전세계적으로 개최되며, 국내의 많은 축제들에서도 '프린지' 개념을 차용하고 있지만 ─ 예술가들에게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이 축제는 일반적인 예술축제와는 달리, 사무국에서 작품을 심사하여 선별하지 않으며 예술가들이 경력에 상관없이 자유로이 작품을 발표하고 교류할 수 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도 매년 100여팀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있었다. 표현하고 싶은 사람들은 프린지에서만큼은 평가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유로운 무대를 펼쳐낸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거칠지만 멋진 원석을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다. 프린지 사무국은 수백개의 무대를 지원하고 관객과 연결하는 플랫폼의 역할을 한다. 나는 누구나 검열 없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프린지 특유의 자유로움에 반했다. 우열이 아닌 다름을, 다양성과 자유로운 표현을 말하는 프린지의 철학은 내게도 큰 영감이 되었다.
그러나 프린지에서 일하는 '현실'은 꽤 터프했다. 나는 프린지에 들어가자마자 '홍보팀장'이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선임들이 때맞춰 전부 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프린지답게, 나에게는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책임이 주어졌다.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또 무엇이든 스스로 해내야 했다. 아직 예술이 뭔지, 프린지가 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내 생에 다시 없을, 뜨거운 여름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