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의 기억은 오로지 프린지뿐이다. 프린지를 떠올리면 늘 묘한 감정이 든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언제나 그때의 기억 앞에서는 주춤한다. 이 글도 계속해서 주춤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그랬다.
사랑으로 가득한 여름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발견했고, 마음껏 사랑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만큼 일이 너무 좋았다.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최고로 좋았다. 다양한 예술공간과 교류하는 일, 창작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일, 실험적인 작품을 보고 리뷰하는 일… 그런 일들을 하면서 늘 바라던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 마음이 벅찼다. 정말 적은 돈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때는 행복했다. 매일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나는 왜 그렇게 그게 좋았을까? 나는 어떤 것에 그렇게 끌렸던 걸까? 그 시간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기로 했다. 바로 '정체성'을 기준으로 지난 경험을 재해석해보는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직의 이름도 직함도 다 떼고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일. 그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들어가자마자 '홍보팀장'이 되어버렸는데, 그 역할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잘해보고 싶은 마음을 자극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나의 최대 관심사는 '프린지를 어떻게 이해하고 알릴 것인가'가 되었다.
프린지는 젊은 예술 축제이지만 꼭 지켜야 하는 무언가가 있는, 역사가 있는 브랜드이기도 했다. 수많은 이야기와 가치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90년대 대학로에서 난장을 벌였던 젊은 창작자들은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축제에는 이른바 MZ 세대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새롭게 밀려들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 또한 변했다. 이 시대의 맥락에 맞게 프린지의 정체성을 재정의해야 했다.
"정말 프린지스럽다.", "그건 프린지답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모호하게 느껴지는 '프린지다움'이라는 단어를 명확한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위해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 질문은 늘 '그래서 예술이 뭐지?', '우리는 예술 생태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지?'라는 본질적인 물음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어떤 날은 밤을 새워가며 토론을 했던 것 같다. 프린지에 특별한 애정을 보이는 이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정의한 프린지의 핵심 가치는, '기성의 시스템과 사회가 부여한 역할에서 벗어나 나 스스로 내가 나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무엇이든 실행해 보는 것,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책임지는 것. 그러면서 자신의 한계와 직면하는 것, 내 곁의 동료와 연대하는 것. 그게 프린지였다. 내가 없던 것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프린지 안에서는 언제나 좋은 이야기들이 떠다녔고, 나는 그걸 포착해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잘했다.
내가 축제를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의 주제 아래 다양한 에너지들이 공존한다는 점이었다.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 이야기하는 일을 좋아했다. 다양한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플랫폼 위에 얹혀 서로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모양을 보는게 정말 좋았다.
축제 기간 내내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추진했다. 나는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그만큼이나 좋아했다. 일정한 시스템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좋았고, 이유없이 '그냥', '되는대로' 일하는 것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참 이상하지만 내 안에는 정말 다양한 자아가 있나보다. 내 안의 내가 일을 새롭고 재미있는 일을 마구 벌이고, 또 다른 내가 '대충 일하는 건 싫다'면서 그걸 착착 정리한다. 그러다가 서로 그만하라고 싸우는 느낌이다. (...) 체계적인 게 좋다면서 프린지에서 일을 시작한 것부터가 이상하지. 프린지는 예술계 안에서도 '자유'와 '독립'을 말하는 독립예술가들 수백명이 모여드는 곳이었으니까 말이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잘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다 했을까, 조금 덜 해도 좋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조금 덜 지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일들을 해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나는 또 그렇게 했을 것 같다. 그렇게 하고싶은만큼 다 해보면서 해보면서 나의 부족함도, 한계도 알게 됐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다.
2014년의 가장 대표적인 기획은 <공간실험무대>였다. 기성의 예술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해 보고 싶은 예술가들과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의 매력적인 공간을 발굴하고, 해당 공간을 활용해 작품을 선보이는 특별한 작업이었다. 총 11팀의 예술가들이 함께 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연중 개방일이 40여 일에 그치는 도시의 대표적인 유휴공간이었다. 예술적 상상력으로 이 거대한 공공체육시설의 용도를 변경해볼 생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고 광활한 축구경기장을 돌며 흥미로운 공간들을 탐색하였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경기장을 빙글빙글 돌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을 좋아했다.
실험의 대상이 되는 공간은 총 다섯 곳이었다. 모두 축구경기가 있을 때에만 일부 개방되는 공간이거나 평소에는 전혀 활용되지 않는 공간들이었다. <공간실험무대> 기간 동안 관객들은 평소 허가되지 않은 이 공간들을 방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간의 특성을 활용한 공연예술작품을 관람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이 작업을 ‘예술정복 프로젝트’라 부르며 텀블벅을 통한 티켓 판매를 시도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플랫폼이지만, 그때만 해도 크라우드 펀딩은 낯설고 새로운 방식이었다.) 거대한 공간에 부여된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고 재정의하는 작업은 짜릿했다. 축제가 열린 그 여름, 전혀 다른 시공간이 열렸고 우리는 그 사이를 자유롭게 누비며 특별한 일을 함께 하고 있다는 연대감을 느꼈다.
사무국과 예술가, 관객이 함께 작품을 설명하는 키워드를 생산하는 ‘프린지 키워드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기성 예술의 언어가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작품들을 담아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티스트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면, 기존의 언어로 자신의 작업을 표현할 수 없어 혼란을 느끼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독립예술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관객을 배려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프린지 작품 소개글 대부분이 추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조금 더 구체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싶었다. 예술가와 프린지가 함께 자신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키워드들을 먼저 뽑아내고, 이렇게 만든 ‘프린지키워드’를 축제 홈페이지와 가이드북, 리플렛 등을 통해 공개했다. 유사한 작업은 공통의 키워드로 묶어주기도 했다. 이후 작품을 관람한 관객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작품의 키워드를 덧붙여 주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축제 기간 중에는 이 ‘키워드’를 매개로 관객과 예술가가 만나는 자리도 마련했다. 작품을 관람한 후 관객이 덧붙여 준 키워드를 바탕으로 관객은 예술가에게, 예술가는 관객에게 서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방식의 ‘프린지 키워드 파티’였다. 관객이 일방적으로 예술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없애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작업을 낯설어하거나 저항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화 속의 작업들이 현실로 구현되는 현장은 경이로웠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여러 작품들을 바라보았다. 저녁노을이 번지는 하늘빛을 보며 ‘나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로 종종 그 노을빛을 떠올린다. 그 하늘을 멍하니 보고 있었던 내 모습도, 여름이 물러가는 공기의 무게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단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탓일까, 축제를 마치고 났을 때는 심한 번아웃이 와 버렸다. 나는 왜 일할까? 본질적인 질문이 나에게 찾아왔다. '예술 생태계를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와 같은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나'라는 개인은 무엇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하지? 그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삶'에 대해서만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하게 된 지금 또 고민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좋아했던 만큼, 마음이 변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때 나는 '일'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법을 몰랐던 것 같다. 일이 곧 삶이었고, 삶이 곧 일이었기 때문에 더 분리하지 못했다. '어렵게 찾아낸 이 일에 왜 나는 또 만족하지 못할까?'라며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왜 '마음이 바뀌면 안된다'고 생각했을까? 경기장을 예술공간으로 바꾸는 상상력을, 다양성의 가치를, 나 자신에게 적용해보려는 생각은 왜 못했을까? 변화를 원하는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는 태도도 필요하다.
내가 변화를 욕망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더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건 나는 그 일을 사랑했지만, 그 일의 모든 것을 사랑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의 환경에서 어떤 부분은 나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나를 지치게 했다. 그 순간의 나에게는 뭔가 다른 전환이 필요했다.
경계에 갇히지 않고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일을 더 '잘' 하고 싶어하는, '성장'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발견했다. '전문성'이라고 말할만큼 나만의 분야를 뾰족하게 만들고 싶었다. 경제적인 부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였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커져가던 어느 날,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고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이직을 결심하게 된다.
이직을 결심하는 순간, 나는 '예술'과 작별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다른 가치를 쫓아서 진심으로 가치있고 좋아하던 것을 저버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업계의 분위기가 그렇기도 했다. '내가 다시 이 세계에서 일하는 날은 오지 않겠지' 라는 생각에 슬펐다. 그게 내겐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후 한동안은 내가 '예술'과 관련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말했다. 예술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데 예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괴로워서 예술경영 논문도 쓰지 못했고 학교도 그만두어 버릴까, 여러번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이렇게 내 정체성을 기준으로 지난 경험을 재해석해보니,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확실해졌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일하느냐가 아닌, '어떻게' 일하느냐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예술과 함께 일하고 있다. 내 방식과 내 속도로, 나의 언어로 예술을 말한다. 내가 어떻게 내 삶에 예술을 다시 가져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이어나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