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를 떠난 나는 홍보 전문 회사, 프레인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 1년 전 내가 지원했다가 떨어진 회사이기도 했다. 지원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어느날,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IMC팀에서 인력을 충원하려고 하는데, 1년 전 면접을 봤던 내가 떠올라서 연락을 했다고 했다. 그 당시 내가 했던 프레젠테이션이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IMC팀은 프레인 내에서도 조금 독특한 일을 하는 팀이었다.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기획한다는 일의 본질은 같았지만, 미디어 PR팀과는 다르게 그 메시지를 경험에 녹여 전달하는 일을 했다.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들과의 협업도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문화예술 관련 프로젝트를 주로 맡게 되었다. 사실 처음 이직을 결심했을 때에는 홍보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전문성'을 연마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회사에서는 내가 예술경영을 공부했다는 것과 문화예술 콘텐츠를 기획해온 역량을 높이 평가해 주었다. 나 또한 이전과는 다른 맥락으로 '예술'을 바라보고 연결하면서 새로운 방식의 예술경영을 시도했던 시기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창작자들을 일상에서 소개하며 새로운 접점을 마련했다는 것이 뿌듯했고, 예술의 저변을 넓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을 느꼈다. 항상 ‘매출’만을 이야기하며 호통치던 담당 기업의 관리자가 어느덧 객석에 앉아 웃으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내가 일으킨 변화에 묘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브랜드에 대한 호감도를 형성하기 위한 작업(예술을 통한 경영)이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예술을 위한 경영으로도 느껴졌던 종합적인 프로젝트였다.
예술가의 창작을 있는 그대로 지원했던 이전의 기획과는 달리, 브랜드 관점의 콘텐츠를 함께 만들어 가야 하는 작업에서는 보다 세심한 조율이 필요했다. 예술가와 함께 하는 작업이지만, 예술가의 작업을 지원하는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술가와 기업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도출해 내는 것이 중요했다.
예술가와 협업을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떤 예술가는 ‘저는 용역이 아니라 작가예요.’라고 말하며 자신을 작가로 대우해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고, 어떤 기업가는 ‘이 작품은 색깔이 마음에 안 드는데 새로운 걸 만들어 달라고 하라’는 등 예술가의 작업 성향을 존중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갑-을 관계로만 바라보며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예술가와의 협업을 경험해 보지 못한 동료들은 ‘돈을 받았는데 왜 책임을 다하지 않지?’라고 말하며 예술가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번역가처럼 양쪽의 말을 서로가 이해할 수 있게 바꾸어 전달하고 조율하는 매개 작업이 내 업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뒤, 나는 나름의 매개 방법을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먼저 협업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성향이나 평소 작업하는 방식, 이전의 협업 사례들을 살펴보고 이들의 특성을 파악했다. 그리고 프로젝트 기획 및 협업 제안시 해당 프로젝트의 방향이 예술가의 작업방향과도 일치하도록 설계했다. 애초에 그 예술가의 본질과 맞지 않는 프로젝트나 단순히 기능적으로 결과물이 필요한 프로젝트는 아예 전문 업체와 연계하는 방향으로 바꿨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기업 대상으로는 프로젝트의 기대효과 및 성과 중심으로 언어를 바꾸어 커뮤니케이션하였다. 기업 내 담당자와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담당자도 예술 콘텐츠를 자주 경험할수록 세세한 부분까지는 점검하지 않고 믿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가와 기업가는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분명 같은 한국어인데도,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협업이 성사되지 못하고 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재미있는 논문을 하나 발견했다.
기업은 경제적 성과라는 과업을 이루려는 이익 집단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고, 그 구성원들은 기업의 이익을 우선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심리적 요인이 존재한다. 반면 예술은 상업적인 것을 추구하거나 집단에 소속되어 있기보다 자율성과 독립성을 추구하며 가치 지향적인 태도와 신념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김미현, “기업과 예술의 협력을 위한 문화매개자의 역할 - ‘예술인파견지원’사업 미술분야의 예술가 퍼실리테이터와 비예술가 퍼실리테이터의 역할비교-” (서울: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예술학협동과정 학위논문, 2017), 129쪽.
확실히 그렇다. 기업은 한정적 자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유도하는 특성상 예술가의 고유성이나 차별성을 발견하는 과정보다는 결과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최고 의사결정자의 말 한 마디에 프로젝트의 방향이나 예산이 완전히 바뀌는 일도 잦다. 또한, 협업하는 예술가의 작업 방향이나 색깔을 이해하지 못하고 완전히 다른 작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예술가는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는 반복되는 보고와 수시로 변경되는 프로젝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편이었고, 보고에 필요한 자료들을 원활하게 제출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었다. 작업에 점점 의욕을 잃어가기도 했는데, 이 경우 기업에서는 이들을 ‘무책임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나는 어느 한쪽이 맞고,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둘은 그냥 다르다. 이처럼 예술가와 기업가는 매우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모두에게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양쪽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하는 매개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진다.
위에서 언급한 논문 <기업과 예술의 협력을 위한 문화매개자의 역할 - ‘예술인파견지원’사업 미술분야의 예술가 퍼실리테이터와 비예술가 퍼실리테이터의 역할비교->에서는 매개자의 역할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고, 매개자는 이 역할을 복합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전문적인 업무임을 말하고 있다. 첫번째 역할은 협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획자'이고, 두번째 역할은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원자', 세번째 역할은 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관리자'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사람마다 잘하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로젝트의 프로세스별로 강화되어야 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분석도 재미있었다. 기업과 예술의 협력 준비 단계에서는 서로의 합의를 이끌어 내고 공통의 목표를 설정하는 기획자의 역할이 중요하고(협력/합의), 실행 단계에서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을 해 주고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짜는 지원자의 역할(소통), 양쪽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배려해주는 관리자의 역할(관계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실제 프로젝트를 진행해본 입장에서도 매우 공감되는 연구다.
홍보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건, 최신 트렌드에 예민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한 브랜드들이 요청해 오는 컨설팅의 내용들만 봐도 어느 정도 시대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주목했던 것은, 문화예술과 손을 잡는 기업들이 점점 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문화예술뿐 아니라 '콜라보'라는 말로 이종간의 협업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사람들이 '제품'이 아닌 '경험'에 돈을 지불하는 시대다. 단순히 좋은 물건, 단정하고 깨끗한 시설만으로는 부족해진 것이다. 기업들은 다른 곳에는 없는 차별화된 경험, 독특한 경험을 고민해야 했고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담당자들은 미팅 때마다 난감한 얼굴로 어려움을 호소했다. 차별화된 콘텐츠나 창조적 기획의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으며, 조직에서도 이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으나, 이를 기획하고 실행할만한 내부 인력이 부족다고 했다.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도 하거니와, 평소 즐기지도 않는 '문화예술'이라든지 '스토리'라는 단어를 일에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겠고 부담스럽다고 했다. "뭔가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거 없을까요?"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가들 역시 기업과의 협업은 반기는 편이었다. 지극히 제한적인 순수예술시장 내에서만 콘텐츠를 유통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에, 새로운 시장에서 일해볼 수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문화예술공간이 아닌 다른 접점에서 예술을 향유할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은 관객개발의 차원에서도 의미가 있었다.
기업과 문화예술의 만남이 활발해지고 있기에, 예술매개에 대한 역량과 전문기획자에 대한 수요 또한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화기획자(문화매개자)의 개념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나의 일 또한 아무도 내가 하는 일을 '문화매개'의 관점으로 봐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홍보회사에 소속된 사람이기에, 내가 내 일을 스스로 봐주고 해석하지 않으면 그 일은 그저 '홍보회사에서 한 일' 중 하나가 되어버리고 만다. 내 일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은 나의 몫이다.
나는 문화예술과 기업을 매개하는 매개자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전문성을 가지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이 일이 독립적인 한 분야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문화기획자의 개념과 일, 전문성에 대해서 계속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