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드윈드

책, 이토록 평범한 미래

by 전퐁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p.60)



- 나이가 드니까 말야, 코털도 자꾸 삐져나오고 괴상하게 긴 눈썹도 한가닥씩 생기고말야. 정작 필요한 머리숱은 자꾸 줄고.

- 그러게. 코털은 피부가 늘어져서 그런게 아닐까? 콧속마저도 처지기 시작한거지. 옛날에 나이든 분들 코털 나온거보면서 관리가 안된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젊은 애들보다 관리는 더 많이하는데 할게 너무 많은거.

- 맞아. 애들은 애초에 코털 나올일도 없는거지.


남편과 코털을 주제로 이토록 얘기를 하게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코털에서 시작된 대화는 새치염색, 탈모, 노안, 기타 등등 나이듦의 서글픔과 번잡함의 토로로 이어졌다.


- 그런데 난 좀 의아한 게 있어. 회사에서도 드물지않게 코털나온 사람을 마주친단말야. 그럴때마다, 왜 저사람의 가족들은 아침먹으면서 말을 안해줬을까? 하는 의문이들어.

- 말섞기 싫은거지.

- 푸핳핳핳 그게뭐야.

- 생각해봐. 꼴도보기 싫은 남편이 코털이 삐져나와있어. 그럼 마누라가 "여보 코털나왔어" 할까? 안하지.

- 뭐야, 일종의 복수인가. 어디 하루종일 코털나온것도 모르고 돌아다녀봐라. 이런건가. 너무 야박하네.

- 그럼 니가 말해주든가.

- 으악 나는 말 못해.


그렇다.

코털이 삐져나와있다든가, 립스틱이 앞니에 묻었다든가, 엉덩이가 바지를 자꾸 먹으니 바지 치수를 좀 늘려야겠다는 말은 동료가 해줄수있는 말이 아닌것이다. 친구나 연인이 하기에도 쉽지 않은 말들.

그런 말들은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꼭 해줘야하는 말인데, 어려서는 엄마가 해주고, 나이들면 배우자가 그 역할을 한다. 부부간에 그말들은 아무렇지 않은 것인데, 타인에게 그 말은 하기도, 듣기도 괴다.


- 혹시 사람들은 그런말을 들으려고 결혼하는 거 아닐까? 마누라나 남편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얘길해주겠어? 노년에 외롭지 않으려면 결혼해라 그러지말고, 노년에도 항상 타인의 적확하고도 진실된 시선이 필요하니 결혼해라. 이게 맞는거 같아!

- 대단한 효용을 발견했네. 팩폭을 위한 결혼!


우리는 매일 조금씩 늙어가고, 코털도 매일 자라며, 그와중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잽을 날려 종국에는 바닥에 눕는 신세가 된다. 그럴때, 내옆에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너무 외로우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땡! 틀렸다.


내가 너무 배가고프다고치자. 누군가 옆에서 어머 너 정말 배고프겠다, 어쩌면좋아, 내가 손잡아줄게, 하는 것은 내 허기에는 아무 도움도 위로도 되지않는다. KO의 순간도 마찬가지다. 허기가 그렇듯, 외로움의 순간이라는 것도 타인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롯이 내가 내입으로 내위장으로 씹어삼키고 소화시켜야만 한다. 그리고나면, 그런 죽을것같지만 결코 죽지는 않는 순간들을 이겨내고나면 바람이 분다.


그때야 비로소 옆사람에게 말수있게된다.

- 내쪽으로 바람이 불어왔어. 근데 너 코털나왔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별것도 아니지만 별것도 아니라서 나만 해줄수있는 말을 건네는 . 내 외로움을 견디며, 지켜보는 괴로움도 견디는 것.

그냥 뭐 이런 가성비 떨어지는 것이 결혼인데,

그렇다고 맨날 가성비만 생각하면 다이소말고는 갈곳이 없지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