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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21. 2016

오지랖의 그녀

오지랖이 최대의 위기를 만나다

나에겐 엄청난 능력이 있다. 바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움직이는' 기똥찬 오지랖이다. 5살쯤 친구에게 선물했던 핑크색 지우개가 쓰레기통에 무심코 버려진 사실을 알고 그 친구와 다신 놀지 않았던 나는 그냥 똥꼬집소녀였다. 똥꼬집이 오지랖 능력에서 파생된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는 걸 인지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내가 '눈치 빠른' 사회생활로 얻은 보너스 자아(ego) 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쌓아 올린 오지랖 공력을 한꺼번에 쏟아부은 한 주를 보내고 나서 난 나의 태생적인 꼬질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오지랖이 꼬질한 이유는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수준으로 좋아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브런치의 첫 글을 어떻게 시작할까 꽤 고민했는데 가장 나다운 에피소드로 시작하는 게 어떨까 싶어 오지랖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오지랖의 시작

며칠 전 프랑스 친구 J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이 친구는 내가 대학에서 뉴미디어 수업을 들을 때 발표 파트너를 찾다가 먼저 건넨 안부인사로 친해졌다. 그 후 서로 파리와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꽤 오래 우정을 쌓았다. J에게는 오지랖을 감히 부릴 수가 없었는데 그만큼 자기 취향과 고집이 분명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내가 공격을 들어가기 전 알아서 방어태세를 갖춘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 부모님 집도 아니고 무려 나의 공간에서 그녀의 친구 A와 함께 일주일을 머물기로 했다. 사실 J가 원했던 건 적당한 가격의 게스트하우스 정도였는데 내가 호탕하게 방 하나를 내준다는 제안을 한 게 시작이었다. 그 후 그들이 내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오지랖 공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 3일 전 대대적인 화장실 청소

 : 우리 집 화장실은 깨끗한 편이지만 유럽인들이 보기엔 젖은 화장실 바닥이 눈에 거슬릴 거야. 걸레로 물기를 빡빡 닦아야지. 아 근데 샴푸와 클렌저는 영어로 잘 쓰여있나?  

2. 아침 식량 보충

 : 내가 프랑스에 놀러 갔을 때 그 친구들은 아침에 달걀을 먹지 않았어. 대신 신선한 바게트를 조금씩 뜯어 이즈니 버터를 발라먹곤 했지. 그래! 편한 집에 있는 느낌을 주자. 오월의 종에서 미리 빵을 사다 놓고 이마트에서 (원산지 프랑스를 꼭 확인하고) 치즈와 버터를 사야지.

3. 향기로운 집안 연출

 : 난 평소에 코가 예민해서 디퓨저를 쓰지 않지만 시약병에 천연 에센셜 오일을 넣어서 방에 두면 굉장히 멋질 거야. 그럼 일단 방산시장을 가야겠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는 아침에 눈을 뜨지 못했다.)

4. 방 비우기

 : 엄청난 크기의 트렁크 2개가 이 방을 가득 채울 거야. 그럼 돌아다니기가 힘들겠지. 옷장 하나를 다 비우면 그 안에 트렁크를 두고 옷걸이에 옷을 걸어두겠지. 그럼 옷장에 있는 기존 옷은? 다른 방 옷장에 우겨서 넣자.

5. 도착 열두 시간 전 급작스러운 빨래 빨래

 :그러고 보니 베개커버와 이불을 빨지 않았어. 날씨가 더우니 금방 마를 거야. 세탁기를 네 번만 돌리면 되겠네.


대충 이 정도가 바로 기억나지만 아마 내가 며칠간 벌인 행적들을 녹화해뒀다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투자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텐데 이 친구들이 내 방을 점거한 바로 그 날 나는 내 모든 노력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구들은 화장실 청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아침은 거의 먹지 않았으며 디퓨저가 거슬린다고 한쪽으로 치워두고 옷장 안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난장판이었다. 그들이 떠날 때까지 계속...


본격 오지랖

아마 올해 서울의 무더위는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되지 않았나 싶다. 열대야는 몇 주째 계속되고 있고 한낮에는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해가 머리 꼭대기에 있는 낮 1시에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걸었고 성북동 카페를 바득바득 찾아다녔다. 아마 누군가의 조언처럼 시티투어버스를 태워주고 난 스타벅스에서 여유롭게 책이나 읽었어야 했는데 이미 한번 상처받은 오지랖이란 녀석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식단에 대한 문제였다. A는 채식주의자였고 J는 미트러버였다. 한국에는 삼겹살을 다시 먹기 위해 왔다고 몇 번을 반복해서 얘기했는지 지겨울 정도였다. 이 둘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한번은 조계사에서 운영하는 발우공양에 전날 밤 예약을 하려다가 예약이 꽉 찼다는 말에 굳이 낮 두시에 배를 쫄쫄 굶은 채로 찾아가기도 하고 시장을 휩쓸고 다니며 각자에게 맞는 길거리 음식을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동시에 한국 음식이 맵고 짜기만 하진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건강하고 맛있는 밥집이면서도 관광객이 가지 않을 것 같은 식당을 열심히 조사했다. 하지만 수많은 식당을 제치고 친구가 가장 만족했던 식당은 내가 가고 싶어서 찾아갔던 인천 차이나타운 근처 중국집이었다. 새우 식빵 튀김인 멘보샤와 맵지 않은 해물 국수를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은 후에 친구는 내가 허탈할 만큼 아낌없는 칭찬과 미소를 보여주었다.


여행의 절정은 한라산 등반이었다. 나는 서울에서만 살았고 제주도에는 회사 워크숍 때문에 수시로 갔던 터라 이미 내가 한 번씩 가본 곳으로 코스를 정했다. 거기다 렌터카를 빌리지 않고 '우리는 자연을 사랑하는 도보여행자야!'를 호방하게 외치는 오지랖의 목소리를 빌어 버스로만 각 코스를 다니는 완벽한 여행을 꿈꾸었다. (결론적으로는 엄청난 더위와 피로에 지쳐 마지막 이틀간 카카오 택시를 신나게 이용했다. 우린 택시기사님의 하루벌이를 책임졌다는 칭찬을 나누며 서로를 토닥였다.) 제주도는 계속되는 더위로 비가 오지 않았고 한여름의 한라산 영실코스는 한가했다. 최대한 많은 코스를 보여주기 위해 영실코스로 올라갔다가 어리목으로 내려가는 일정이었지만 사실 영실코스만큼의 풍광은 보지 못했고 가파른 동산을 내려가느라 우리는 다음날 아침 종아리 근육이 째지는 아픔을 경험했다.


난 모든 여행 일정을 장악하고 있어야 했다. 시간대 별로 있어야 할 장소에 도착해야 했고 예상 가능한 고통과 환희를 경험해야만 했다. 마치 내가 여행의 신이 된마냥 친구를 앞세우고 열심히 걸어 다녔지만 사실 보잘것없는 나 자신을 '불확실성'의 신은 날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만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내 오지랖에게 이제 그만 욕심을 내려놓지 않겠냐고 넌지시 제안했다.

(협재 해수욕장 앞에서 우리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바다만 바라보았다.)


오지랖의 끝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감귤주스를 입에 잔뜩 머금고 처절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나는 과연 행복할 것인가? 때로 미치도록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도 정작 내가 개입하는 타인의 하루 일상은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어 하는 본성은 어디서 시작되는 걸까?


사실 가장 큰 오지랖을 부려야 할 대상은 나 자신이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집요하게 찾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경험과 지식을 끝까지 고집하는 게 내 오지랖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머리로 깨닫는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부릴 오지랖이 얼마나 내 호기심과 관심사를 넓혀가는지 브런치를 통해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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