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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r 31. 2017

나의 드로잉 박스

추억, 사람, 골목을 담다.


버려진 박스가 있었다. 


작은 관 뚜껑을 열면 마치 어린 시절의 내가 누워있을 것만 같았다. 세상 어디에 닿아도 만족할 수 없었던 아이가 즐거운 기억으로 둘러싸여 있다면 행복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9월 말,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광주의 한 골목을 찾아갔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급하게 떠나느라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 후 20년이 흘렀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재건축 안내 전단지를 제외하면 모래바람이 살랑였던 언덕도, 아슬아슬하게 서있던 감나무도 그대로였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시를 쓰고 별과의 거리를 헤아리며 밤을 보냈던 내 방 창문도 그곳에 박혀 있었다. 




봄 향이 올라오는 늦은 오후에 외할머니 손을 붙잡고 쑥을 캐러 가곤 했습니다. 외할머니 등 뒤로 저무는 해가 점점 붉어오는데 제 손에 쑥은 그대로입니다. 철조망 너머 손을 뻗자 아얏! 손가락에 붉은 피가 금세 번지기 시작합니다. 외할머니의 딱딱한 손바닥이 제 손을 안았습니다. 집으로 오는 골목에 그림자가 길게 마중 나왔습니다. 따뜻한 외할머니 손의 감촉은 그 길에 스며들었습니다. 




묶여 있던 얼굴이 한 숨을 토해낸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맛과 씁쓸한 향이 코로 밀려들어온다. 내 감각은 이미 무덤이 되어 죽어가고 있다. 작은 흔적이 살아남아 기억을 되살린다. 도시의 차가움이 몹쓸게 다가왔다. 눈물은 이미 말랐지만 두 눈은 감을 수 없다. 



온갖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고 있다. 너와 나의 구별은 없다. 모여있으나 존중하지 않는다. 네 옆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마라. 

저 쪽 세상에도 온갖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고 있다. 이곳과 저곳은 다르지 않다. 다리는 있으나 건널 수 없다. 네 옆 사람에게 실례를 범하지 마라. 



눈만 있는 사람과 귀만 있는 사람이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보기만 하고 듣기만 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침묵하는 시간이 언제쯤 끝날까? 눈을 감고 귀를 닫으면 지금과 다른 게 무엇일까?



나를 스친 수많은 사람들을 종이배에 담아 흘려보냅니다. 

나와 구별할 수 없었던 그들이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여기서 나가면 동동동 떠나가라고 나에게 다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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