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진 Sep 19. 2016

무엇을 향한 자유인가요?

사표에 담긴 의미와 무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읽다 보면 요즘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시장에서 팔릴 만한 상품(object)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자아를 갈고닦지는 않는다.  그들은 고의이든 무의식적이든 항상 거짓말을 해서 그들의 이미지를 보호하려 하지 않고 진실을 억압하기 위해 힘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아직 자신이나 생활의 지표가 될 목적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소유하거나 소비하기 위함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To have or to be', 2013, 64p)


소유를 위해 사는 대다수의 사람과 구분 지어 에리히 프롬은 젊은이들을 응원하지만 동시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젊은이들 대다수는 '~로부터의' 자유에서 '~로의' 자유로 발전하지 못했다. (Many of these same young people had not progressed from freedom from to freedom to.)


나는 SBS 스페셜 <젊은것들의 사표>를 보면서 이 다큐의 초점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해방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은 경직된 조직문화가 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야근과 회식일 수도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말로만 듣던 회사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을 때 느끼는 개인의 자괴감이 굉장히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힘들게 들어온 지옥을 빠져나간다고 결심했을 때 동료들은 퇴사 파티를 열어주며 축하해준다. 동료들은 '나는 과연 언제 탈출할 수 있을까?'라며 퇴사자를 부러워한다. 


하지만 인생은 쇼생크탈출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전반적으로 정말 중요한 지점인 젊은이들의 '무엇으로부터'가 아닌 '무엇을 위한' 자유에 대해 섬세히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기를 함께 통과하고 있는 비슷한 또래들이 겪는 다양한 결의 고민을 '자아실현', '꿈', '재미'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 퉁치고 넘어가려는 시도가 아쉽다. 아마 모든 20,30대 개인의 사연과 고민이 다 다르겠지만 그저 내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이 지점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다. 


1. 윗분들은 '젊은것들의 사표'가 정말 궁금할까? 


나도 퇴사를 두 번 했다. 그리고 그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얻은 자연스러운 깨달음은 '난 조직에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점이다. 당연히 조직에서 개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 점이 신입사원에게 쉽게 간과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입사 과정이 지나치게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한 고스펙 퇴사자가 지속적인 경쟁이 자극을 준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누구나 원하는 대기업의 그럴듯한 직군에는 엄청난 수의 지원자들이 모인다. 그리고 자신이 최종합격자가 되는 순간 환희와 더불어 수많은 지원자들이 떠오르며 스스로 굉장히 '대단'해진다. 하지만 회사는 정말 내가 필요해서 뽑은 걸까? 나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회사의 관성과 관습으로 인해 내가 '우연히' 뽑힌 게 맞다고 봐야 한다. 매년 모든 회사의 인사팀은 다른 부서와 마찬가지로 업무계획을 세우고 채용계획을 발표한다. 윗선에서 특별한 지시가 떨어지지 않는 이상 대부분은 신입사원 공채시즌에 적정 수의 채용계획을 그대로 가져간다. 최종합격자는 스스로 대단하다고 여기고 어깨를 활짝 편 채 들어왔는데 회사는 시큰둥하니 처음부터 둘의 궁합은 맞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비극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야 다들 알다시피 대학만 나오면 대부분 취업이 되던 시대니 회사에 들어가도 비슷한 또래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누구나 아는 큰 기업에 들어가면 비정규직이 아닌 정규직 20,30대는 쉽게 찾기 어렵다. 꽤 오랫동안 회사에서는 경기가 어려우니 채용규모를 줄여왔고 신입사원들은 뿔뿔이 흩어지니 대리 달고 과장 달아도 내가 막내일 확률이 높다. 조직 내에서 목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내가 죽을 고생 하며 스펙 만들어 회사에 들어왔다는 건 아무도 모른다. 회사는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려 하고 그저 신입사원에게 빨리 적응하라 다그친다. 


적응하지 못한 신입사원이 나가면 어떻게 될까? 회사에서는 인력을 들여 필기시험 문제를 만들고 면접관을 동원하고 신입사원 연수 등의 비용을 들인 게 모두 헛수고가 된다. 내가 첫 번째 회사에 들어갔을 때 연수를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이 바로 그에 대한 내용이었다. "너희가 밥값 하려면 3년 걸린다. 그동안 회사에서 월급 주며 가르치는 거니 열심히 배워야 한다." 그리고 내가 1년 4개월 만에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나는 채용공고와 전혀 다른 부서에 배치하고 나에게 일을 못한다고 갈구었던 상사와 단 한마디도 얘기하지 못하고 회사를 나왔다. 아마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1년 4개월 동안 나를 지켜보며 내가 적응 못한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판단했을 거다. 어떤 이유이건 조직은 내가 그만두었을 때 미치는 파급효과를 최소화하길 원하지 진짜 사표를 내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런 윗분들에게 신입사원들이 그만두는 조직 내부적인 이유(야근, 상사, 회식 등)를 외친다고 변화가 일어날까?


2. 비정규직 벗어나서 정규직 됐는데 왜 그만두지?


정규직이 되기 위해 비정규직 2년, 4년을 이 악물고 버티다가 드디어 정규직이 됐는데 그만두는 사람이 있다. 방송에서도 이를 안타까워하는 아버지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아들이 등장했다. 방송을 유심히 본 사람은 당연히 궁금증이 생긴다.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는 신입사원이야 조직문화에 적응 못하고 그만둘 수 있지만 이미 겪을 대로 겪은 사람이 왜 저렇게 금방 그만두는 걸까? 방송에서는 자세한 사연이 소개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상황을 추측해보면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정규직에게 회사가 요구하는 책임과 충성의 수준이 비정규직에게 요구하는 것과 다르다. 또, 비정규직인 한 사람의 목표가 정규직이라는 한 직위로 수렴되는 순간 갈등과 고민이 시작된다. 


모든 회사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규직은 전반적인 업무를 모두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고 비정규직은 특수업무 또는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경우 상사가 비정규직의 업무를 모두 꿰뚫고 있기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규직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면 당연히 상사가 신입사원 시절에 해본 일이기 때문에 쉽게 업무지시를 할 수 있지만 비정규직이 2년마다 교체되며 인수인계를 해왔다면 상사가 직접 그 일을 해봤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 그런 경우라면 비정규직이 간섭과 지시를 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책임을 져야 하는 성격의 업무를 해야 한다면 갑자기 높아진 부담감이 버거울 수 있다. 


예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비정규직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인적인 목표가 정규직이라고 한 적이 자주 있었다. 그리고 정규직 직원들은 꿈을 이뤘으니 인생의 큰 걱정은 없지 않냐고 넌지시 부러운 투로 이야기하곤 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는 '비정규직의 월급이 정규직보다 많고 다양한 경험을 쉽게 할 수 있는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사회적인 시선으로 차별하지 않아도' 정규직을 원할 건지 묻고 싶다. 물론 안정적인 정규직을 원하는 성향의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똑같은 대학을 바라보고 좋은 회사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만 착한 아들딸이 되는 것으로 훈련받아왔기 때문에 내가 다른 것을 원하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받지 못했다. 내가 스스로 정한 목표가 아닌 사회가 좋다고 평가하는 자리가 내 목표라고 믿으며 열심히 추구할 때 막상 이 목표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받아들이기 힘든 건 당연하지 않을까? 


3. 회사는 철저하게 나를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삼성 임원을 역대 최장 기간 역임했던 분이 출연했다. 그분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 끈기가 부족하고 목적의식이 없다고. 나는 오히려 명쾌하게 방향성을 알려준 그분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스쿠버다이빙 강사를 하고 아이스크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는 청년들의 메시지는 그렇게 명확하진 않았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추구할 때는 끈기가 있고 목적의식이 충만하다. 어떤 사람에게 누군가가 끈기가 없고 목적의식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사람이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가며 지키려고 노력하겠는가. 삼성 임원을 했던 분이 요즘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주변 사람 평판은 어떤지 자세히 나오진 않았지만 그분은 회사가 인생 전부라고 여기고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사는걸 '당연하게' 여긴다. 반면 젊은것들인 우리는 회사가 당연히 우리의 모든 여가시간과 가족을 빼앗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대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원하는 것을 최대한 추구하는 태도를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으로의 자유로 나아갈 것인지 발전하지 못하고 아직 헤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시작점은 나에 대해 철저하게 사유하며 고민하는 것인데 사실 우리는 신입사원이 되기 전까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인생을 모든 단계마다 1등으로 통과해야만 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가 같은 문을 바라보며 달렸다. 대다수는 중간에 탈락했고 마지막으로 대기업에 입사하는 순간 우리는 인생의 승리자가 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때서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달려온 길을 보니 너무 처참하다. 수많은 낙오자가 보이고 내가 매정하게 버렸던 친구들도 있고 경쟁에서 이겼을 때 기뻐하기만 했던 이기적인 내 모습이 남아있다. 그렇게 얻은 이 자리가 그 정도로 가치 있는지는 조금만 일해보면 알 수 있다. 왜 신입사원의 직무 설명은 그렇게 추상적이고 짧은지, 회사는 아무렇지 않게 내가 전혀 일하고 싶지 않은 부서로 날 배치하는지, 왜 조직은 내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회사 밖이 전쟁터라는 것도 알고 있고 아직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고 힘들게 들어온 모든 과정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해서일 수도 있다. 


그래도 내가 내린 짧은 결론은 어떤 이유라도 회사는 철저히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사표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사표를 내기로 결심한 개인의 선택이 윗사람에게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사표를 내지 않은 사람도 언젠가 탈출할 날을 기대하거나 조직이 알아서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조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한 역할이 남아있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의 능력과 관심사에 맞는 조직을 선택해서 일할 수 있고 적어도 회사를 나올 때 상사와 부하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하게 함께 일했던 사람으로서 서로를 응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사람 닮은 옥수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