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을 좋아합니다.

by PongJoo


언제부터인가 얼음을 좋아하게 되었다. 십여 년도 훨씬 더 전의 어느 겨울날, 친구와 함께 모 카페에서 아이스 녹차라떼를 마시던 중이었다. 그 날 ‘얼음이 맛있다.’ 라고 느꼈던 것이 기억의 시작이다. 얼음에 ‘맛’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다들 신기하게 생각해서 어디 가서 티내고 싶지는 않지만, 만남의 필수코스인 카페만 가면 얼음을 깨물어대고 있으니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왜 얼음을 좋아하는 것인가.

무엇인가 좋아지기 시작하면 이유를 찾게 된다. 가끔씩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다. 어째서 좋아한다는 감정을 먼저 깨달은 뒤에 그 이유를 하나씩 갖다 붙이게 되는 건지. 나의 감정이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심리가 아닐까. 누군가가 좋아지기 시작해도 일단은 그것을 부정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좋으면, 좋아할 만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이유를 찾지 못하면 살짝 불안해진다. ‘좋아한다’는 단어에 근거가 없으면, 그 감정은 깃털처럼 가벼이, 금세 사라지고 말 것만 같아서. 그 가벼운 여운이 때로는 나를 더 슬프게 할 것 같아서.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그랬다. “나를 왜 좋아하세요?”라고 질문하곤 했다. 그 대답이 우리가 관계를 지속할 만한 근거가 되는지 척도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는지.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이라든가 “전부 다 좋지” 혹은 “이유가 어디 있어. 언제부터인가 좋아졌지” 같은 대답들. 맞다. 사실은 그게 정답이다.

오늘도 얼음을 와그작대며 이런 별 쓸모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도 이상하지 않다고는 말 못하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왜 얼음을 좋아하는 것인가. 일단 얼음은 청량하다. 생긴 것부터가 청량하게 생겼다. 하얗고, 투명하고, 깨끗하다. 얼음이 가득 담긴 유리컵을 보고 있으면 기분까지 상큼해진다.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내는 소리도 예쁘다. 달그락 달그락 거리기도 하고, 찰각 찰각거리기도 한다.


시각적인 이유는 이러하고, 이제 질감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보자. 얼음의 맛은 질감으로 결정이 난다. 얼음이 맛있다고 느끼는 시점은 완전히 잘게 부서져서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있다. 따라서 어떻게 부서지느냐 하는 것이 얼음의 맛을 좌우한다. 나 같은 경우는 ‘딱!’하는 소리라든가 ‘뿌드득!’ 하면서 깨지는 얼음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와그작’,‘와사삭’ 하며 쉽게 부서지는 얼음이 맛있다. 그렇게 따지면 살얼음도 맛있지만 입안에서 너무 빨리 녹아버려서 식감이 조금 떨어진다. 그러나 역시 맛있으므로 간혹 고깃집 같은 식당에서 살얼음을 띄운 식혜가 후식으로 있으면 그 가게는 참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쉽게 부서지는 얼음은 어떤 얼음일까? 당연히 커다란 얼음보다는 작은 크기의 얼음이 씹기에 좋다. 또 투명한 얼음보다는 불투명한 얼음이 좋다. 안에 공기 기포가 공간을 이루며 갇혀 있어서 투명한 얼음보다 잘 부서진다. 가끔씩 얼음 전체가 하얗게 불투명한 것들이 있는데 깨무는 순간 ‘바사삭’하고 부서져서 내게는 최고의 빙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냥 얼린 얼음보다 얼린 뒤에 가공한 얼음이 더 잘 부서진다. 마지막으로 갓 얼린 얼음이 맛있다.


얼음이 그렇게 좋으면 집에서 많이 얼려먹으면 되지 않으냐고 주변 지인들이 얘기하곤 하는데, 당연하게도 그럴 수가 없다. 이미 여러 종류의 얼음의 맛을 알아버렸고 집에서는 그 맛을 내기가 어려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얼음은 A카페의 얼음이다. 마침 내가 살던 집 바로 앞에 A카페가 있어서 나는 거의 매일 그 곳으로 출근을 해서 항상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이상하게도 얼음은, 아메리카노 같은 맑은 음료와의 궁합보다는, 조금 점성이 있는 음료와 궁합이 맞았다. 그래서 주로 라떼가 들어간 음료를 시켰다. 얼음만 너무 먹다보면 입안에 쓴 맛이 감도는데 이 때 그것을 중화시켜줄 수 있는 음료가 바로 초코라떼였다. 그리고 병 음료를 하나 더 주문하면 얼음 컵이 따로 나왔으므로 나는 그렇게 두 가지 음료를 테이크아웃해서는 집에 돌아와 한 잔씩 먹곤 했다.


얼마나 자주 갔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VIP고객 비슷한 것이 되어서 카페 직원이 한 번씩 머그컵이라든가 새로 나온 과자 같은 것을 챙겨주기도 했다. 나중에는 주문할 때 말하지 않아도 음료에 얼음을 한도까지 가득 채우고는 돔 뚜껑으로 고정시켜주었고, 더 나중에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기만 해도 알바생이 초코 파우더를 타는 거였다. 몇 년 동안 많은 직원들이 바뀌었는데 주의해야 할 고객으로 나의 존재가 인수인계 사항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분들이 내 글을 읽을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다. 한 번쯤 저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 초코인가 병 음료인가 얼음인가 셋 다인가 한 번이라도 직원들끼리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면 여기서라도 고백하겠다. 단연 얼음 때문에 갔다.


같은 카페의 얼음이라도 어느 시간대에 가느냐에 따라 맛이 다르기도 하다. 이 얘기까지 하면 미쳤냐고 할까봐 남편에게만 말한 것 같은데, 오전보다 밤에 가는 것이 얼음 모양도 맛도 신선한 상태였다. 아마 제빙기가 얼음을 생산해내는 시간이라든가 만들어 낸지 얼마 안 되었다든가 하는 점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점의 얼음은 어느 시간대에 가도 비슷한 걸 보면 얼음이 팔리고 또 만들어지는 순환이 빠르게 이루어져야 좋은 듯 했다. 이쯤 되니 그 카페의 제빙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산 일본 브랜드의 제빙기였다. 하, 일본은 얼음까지 잘 만드나.


얼음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도저히 공감대 형성이 안 될 분위기를 고려해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쭉 나열해놓고 보니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나는 정말로 얼음을 좋아한다고 말할 만한 자격이 있구나. 나는 어디 가서 얼음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얼음에 대한 나의 애정은 ‘진짜’이니까 말이다.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무언가를 알고,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서, 이유를 찾고, 대상을 관찰하고, 그리고 또 새로운 발견을 하고, 그리하여 더 좋아지는 거. 그렇게 쌓여진 ‘좋아함’은 견고하게 마음에 뿌리내려서 나만의 것이 된다.


있어 보이려고 좋아하지도 않는 장르의 책을 구입한 적이 많다. 필요에 의한 취미를 억지로 가져본 적도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려고 애써본 적도 있다. 하지만 성공한 적은 없었다. 정말로 좋아하는 건 거짓으로 흉내 낼 수가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그렇지 않을까. 처음의 ‘좋아함’은 그저 감정에 스파크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 스파크의 힘으로 우리는 너를 왜 좋아해야만 하는지 서로에게 이유를 붙여주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함께 이유를 만들어 가다보면 세월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지는 사이가 될 것이다. 묵직한 ‘좋아함’을 갖게 될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몇 년 전인가, 신나게 얼음을 먹어대다가 문득 나의 치아가 염려되어서 얼음중독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다. 물론 얼음을 섭취하지 않으면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중독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빈혈이 있는 사람의 상당수가 얼음을 많이 찾는다는 것이었다. 과학적인 근거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빈혈을 달고 사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더 신빙성이 있었던 이유는 내가 유일하게 얼음을 먹지 않았던 시기가 바로, 출산을 위해 철분수치를 최대로 올렸던 임신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혈 수치가 지금보다 좋아지면 나는 얼음을 자주 찾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드디어 얼음과 작별할 위기가 오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의 관계는 이미 묵직해졌으니. 좋아했던 마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청량한 모습으로 내 곁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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