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Pong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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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한 나라에서


나는 전업주부이다.

물론 한 사람의 직업이야 일생동안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결혼과 동시에 지금까지는 그랬다. 나는 결혼식장에 들어가던 순간에도, 내가 결혼을 하면 전업주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멋모르고 결혼을 했다. 실감이 없었기에, 결혼 후에도 딱히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은 것 같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 집에 살게 되었네. 라고 느끼는 정도. 그러나 이토록 아무 생각이 없던 나에게도 일말의 주저함을 불러오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혼 한 내 신분에 대한 고민이었다. 어디 회원 가입이라도 할라치면 꼭 직업을 선택하는 칸이 있었다. 직장인, 대학생, 만 14세 미만...... 물론 ‘주부’도 있었지만 나는 늘 ‘기타’를 선택하곤 했다.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전업주부에 대한 명예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업주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아침에 일어나 아이를 챙겨 유치원에 보내고 돌아서면 산더미 같은 설거지거리와 흐트러진 이불 위의 밥풀, 과자 부스러기들, 며칠 만에 현관을 가득 채운 재활용 쓰레기와, 하루 두 번은 세탁기가 돌아가야 될 것 같은 빨래들이 나를 반긴다. 게다가 삼시 세끼 잔칫밥을 짓는 것도 아닌데 그 놈의 밥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왜 이리도 스트레스를 주는지.


어떤 날은 눈에 보이는 청소만 후다닥 해놓고 물때가 낀 화장실이나 더러운 가스레인지 같은 건 애써 외면하며 밖으로 나가기도 한다. 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 두어 시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거다.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늦은 오후의 햇살이 가느다랗게 비치는 거실에 가만히 앉으면, 어쩐지 허무한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런 허무함도 잠시, 이윽고 아이가 하원할 시간이 다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아이 뒤치다꺼리를 쉬지 않고 해야 하는 저녁시간, 그 2차전 준비를 해놓고, 잠깐이라도 멍하니 앉아 쉬다가 아이를 마중 나가는 일상.


다른 직장인들이라고 다를 게 있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워킹맘이 와서 내 멱살을 잡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굳이 그들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특색이 없어지는 사람이 된다고 대답해주고 싶다. 누군가가 “무슨 일 하세요?” 라고 물었을 때 “주부예요.” 라고 답하면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어지는 것처럼. 마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이 다 비슷비슷해지는 느낌. 주부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게 인간사에서 얼마나 중대한 일인가. 다만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 이 일이 얼마나 사람을 특징 없고 의미 없게 만드는지 아무도 몰라줄 뿐이다.


나는 어쩌다 우연히 시계토끼를 따라 원더랜드로 오게 된, 액면가는 삼십대인 앨리스이다. 이 원더랜드가 나날이 사람을 당황시킨다. 내 정신은 앨리스의 몸만큼이나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변덕이 심하고, 내게 안긴 아기는 계속해서 울어댄다. 눈물 웅덩이를 헤엄치고, 온갖 동물들과 입씨름을 하면서 겨우 가고 싶었던 예쁜 정원에 도착해보니, 고약한 여왕이 툭하면 목을 베라고 난리다. 그러면 날 이곳으로 이끈 시계토끼가 남편이냐고? 천만에. 그는 원더랜드에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는 네버랜드에 사는 피터 팬이다. 그 역시 액면가가 좀 나가는. -본문 中에서


아내이자 엄마로 산다는 건 내게 사고와도 같은 일이었다. 이상한 나라였다. 180도로 달라진 환경에 내몰리는 동안, 나는 내가 생각해왔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걸까. 앞으로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 걸까.


애벌레가 앨리스에게 물었다.

“넌 누구니?”

토끼굴을 통해 이상한 나라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즉 오늘 아침에 일어났을 때만 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앨리스는 대답을 망설였다.

“지금은...... 저도 저를 잘 모르겠어요.”


언어유희와 말장난으로 가득한 이상한 나라에서 앨리스는 계속해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과 맞닥뜨리고, 이해할 수 없는 인물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그래서 앨리스는 슬프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하며, 발끈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방인 앨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쓴다.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그렇다고 ‘나’로서도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우울한 날들을 보냈다. 한심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군가를 원망한 밤들도 보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이상한 나라에서 두 발로 단단히 서서, 우아하게 살아내고 싶었다.


‘우아하다’


우아하게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품위가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그것들이 동반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우아함이 꼭 그렇지는 않다. 내가 바라는 우아한 사람이란, 자신이 발 딛은 현실이 어디쯤인지 잘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옆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 쉽게 낙담하지도, 쉽게 실망하지도 않는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숨은 진주를 발견해내고, 지친 일상에 스스로 달콤한 가루를 뿌릴 줄 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우아하게 살기 위해 나는 먼저 나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 책은 그런 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를 발견하고, 내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 내 행복을 내가 재단하며 주체적으로 살아내기 위한, 그렇게 우아해지기 위한 연습. 이렇게까지 시시콜콜한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부끄럽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고, 불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담담하고 즐겁게 이 글을 썼다.


앨리스는 숲에서 만난 체셔 고양이에게 물었다.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될지 알려줄래?”

체셔 고양이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려 있지.”


아내와 엄마, 그리고 자신과의 사이를 줄다리기 하며 아슬아슬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 줄다리기가 어느 한 쪽으로 크게 치우치는 날이 있더라도 부디 더 이상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를. 자신의 행복을 쉽게 포기하지 않기를.


이상한 나라에서 헤매고 있을 나와 비슷한 누군가에게, 타인의 요구에서 벗어난, 내가 원하는 나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가족이 원하는 이상적인 아내로, 완벽한 엄마로 살고 싶어 딜레마에 빠진 여성들에게, 부디 나의 소박한 위로와 한 줄의 공감이라도 건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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