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기다리던 디자이너에서 일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디자인 실력이 늘어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찾아온다.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을 때가 아니라,
어느 날 문득 일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는 순간이다.
디자인 실력이 늘어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조용하게 찾아온다. 새로운 툴을 배웠을 때도 아니고, 강의를 들었을 때도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내 디자인 실력이 갑자기 늘었다고 느꼈던 순간은 세 번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껴 시작한 일이었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나는 꽤 손이 빠른 디자이너였다.
상사가 일을 던져주면 생각보다 빨리 끝내는 편이었다. 문제는 일을 끝낸 다음이었다. 작업을 마치면 다시 상사가 나에게 새로운 일을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상사도 항상 줄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일이 없으면 핀터레스트에서 레퍼런스를 보거나 친구들과 카톡을 하거나, 잠깐 멍하니 시간을 보내곤 했다. 게임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산적인 시간도 아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항상 일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미래의 내 작업을 더 쉽게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당시 우리 회사는 디자이너가 한두 명 정도였고 디자인 시스템도, 체계적인 디자인 프로세스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컴포넌트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들면서 점점 보이기 시작했다. 어떤 컴포넌트가 자주 쓰이는지, 어떤 것들은 거의 쓰이지 않는지, 무엇을 묶어야 효율적인지 같은 것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피그마 숙련도도 자연스럽게 올라갔고 컴포넌트를 바라보는 시야도 완전히 달라졌다. 돌이켜보면 입사 이후 내 디자인 실력이 처음 크게 늘었던 순간이었다.
두 번째로 실력이 크게 늘었다고 느낀 순간은 회사가 조금 커지고 디자인 팀원이 세 명 더 생기면서였다. 그 전까지는 거의 혼자 일하는 환경이었는데, 팀이 생기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는 혼자 잘하는 것보다 팀 전체의 디자인 퀄리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해졌다.
그래서 팀원들에게 물어봤다. “지금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게 뭐예요?” 대부분의 대답은 비슷했다. 그래픽 실력이 부족한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데일리 그래픽 스터디를 시작했다. 매일 하나의 그래픽 주제를 정하고 각자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오는 방식이었다. 퇴근 후 각자 작업을 하고 다음 날 점심시간에 모여 서로 피드백을 했다.
이 스터디는 약 두 달 동안 진행됐다. 그 시간 동안 팀원들의 피그마 숙련도와 그래픽 이해도는 눈에 띄게 올라갔다. 흥미로운 점은 나 역시 함께 성장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스터디를 리드하고 알려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참여해 보니 나도 하나의 스터디 멤버였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과정이 결국 나 자신을 가장 많이 성장시키는 과정이구나.
세 번째로 실력이 크게 늘었다고 느낀 순간은 디자인을 넘어서 팀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였다. 일을 하다 보니 점점 느끼는 문제가 있었다.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사이의 소통이 생각보다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소통을 디자인 툴 안에서 해결할 수는 없을까.
모두가 사용하는 툴은 피그마였다. 그래서 피그마 안에 기획 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가이드를 만들고 나니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개발자와 기획자가 피그마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을까?
그래서 팀원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피그마를 쓰면서 어떤 점이 불편한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사내 피그마 세미나를 열었다. 오토레이아웃 기본부터 기획 가이드를 사용하는 방법, 개발자를 위한 Dev Mode 활용법까지 정리해서 공유했다.
작은 강의였지만 반응은 꽤 좋았다. 강의를 수료한 사람들에게는 작은 수료증도 만들어 전달했다. 그 경험을 통해 한 가지를 확실하게 깨달았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결국 나의 실력을 가장 빠르게 성장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디자인 실력이 늘었던 순간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을 기다리던 디자이너에서 일을 만드는 디자이너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던져주는 일만 처리할 때는 실력이 천천히 늘지만,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려고 할 때 성장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
아마 많은 신입 디자이너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일이 없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실력이 늘지 막막한 순간들 말이다. 만약 그런 시기에 있다면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면 좋겠다.
지금 이 회사에서 내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질문이 여러분의 디자인 실력을 가장 빠르게 성장시키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