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라디오에서 배순탁 작가를 진지충이라 부르는 바람에 배철수 형은 청취자들에게 항의를 받고 사과를 해야 했다. 이제는 사람을 벌레보듯 하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철수 형이 무심결에 실수를 한 모양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사람이 대체 벌레보다 뭐가 그리 잘났다고 얕잡아 보는 표현으로 무슨 무슨 '충' 거리는 걸까? 매일같이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사리사욕을 위해 쓸데없는 싸움질이나 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인간들에 비하면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 매일 매시간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벌레가 훨씬 나은데 말이다. 갑작스럽지만 나는 나중에 개인 스튜디오를 가지게 되면 그 이름을 '롤링 비틀'이라고 하련다. 쇠똥구리 정도 되는 곤충이 아프리카 누우가 지나간 발자국 진흙탕 속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한낱 짐승 발자국에 그치지 않고 넘보지 못할 거대한 태산과도 같아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히 모은 쇠똥을 밀고 올라가기 위해 수백, 수천 번의 도전을 하여 결국 극복해 내고 마는 작은 쇠똥구리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짐짓 인간에게서조차 느끼기 힘든 존경을 느꼈기 때문이다. (쇠똥구리의 영어 이름은 롤링 비틀이 아니라고? 이름 짓는 건 내 맘이다.)
그렇다면 결국 또 실존인가? 본질에 대해서는 떠들 필요도 없다. 우리의 본질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저 쇠똥구리와도 다를 바가 없다. 쇠똥구리가 다 무어냐? 때가 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죽기 전 마지막 힘을 짜내 아무렇게나 방정해 버리고 마는 연어와도 다를 것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의 본질이 탄생 그 자체임은 말해 입만 아프다. 탄생했기 때문에 실존하고 또다시 탄생을 야기하며 끝없이 돌고 도는 게 전부다. 뗄레야 뗄 수 없고 선택할 수 없으며 그래서 어쩌면 천만다행인 이런 고뇌인 것이다. 벌레로 태어나서 오로지 번식을 위해 기계처럼 생존해야 하는 삶에 갇혀 있자면 최소한 정신의 고통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을! 하지만 가족을 만들고, 타인과 대화를 하고, 음악을 듣고 감동받으며, 좋아하는 그림을 끌어안을 때의 기쁨이 포기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자연계 전체로 따지면 별 볼일 없는 처지에도 관계와 협동이라는 강력한 기술을 중심으로 생존을 도모했으니 우리의 생존과 번식과 고통은 그야말로 혼연일체다. '쓸모'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타고난 업인, 생애 주기의 필수 단계들을 수행하려면 기실 우리의 거대한 몸체인 이 사회관계망의 한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개개인 스스로가 무슨 수를 쓰던 증명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놈의 고약한 인생은 길기는 또 왜 이리 긴지? 아무튼 자기 자리만큼은 용사처럼 싸워 얻던지, 벌레처럼 바쁘게 손발을 놀리며 바짝 들러붙던지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번거롭고 치사하다고? 그러면 애초에 타고나던가!
일을 하고 싶은가?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면 일을 하기가 싫을 것이다. 그런데 일자리를 잃으면 또 어떤가? 살고나 싶을까? 인간 사회는 우리에게 끝없이 '쓸모'를 묻는다. 가장이건 노동자건 사업주건 심지어 아직까지 사회로의 편입이 유보된 어린아이조차도 언젠간 쓸모를 찾아 눈치를 살펴야 한다. 일을 하면 일하는 삶이 싫고 일을 안 하면 쓸모없는 삶이 싫다. 불현듯 태어난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든데 그렇다고 그냥 죽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이리저리 코를 들이밀고 한 몸 눕힐 둥지를 파 보아도 굴 안이나 밖이나 불편하긴 매한가지다. 그러니 정녕 이 굴레를 벗어날 방법은 없단 말인가? 도대체 어쩌자고 자유와 지성을 동시에 가져 이 난리냔 말이다. 하여튼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으니 우연하고도 비극적인 사고를 맞이하기 전까지 '일벌레'였던 사람이 있다면 그가 몸이 좀 아파 출근 좀 못한다고 해도 벌레 취급은 하지 맙시다. 아니 최소한 해충 취급이라도 하지 말아야지. 사고 아니오? 사고! 누가 벌레가 되고 싶어 됐답니까? 따지고 보면 '일벌레'에게 생계를 의지하던 사람들도 결국 벌레 비슷한 것 아니오? 아아... 그래도 나는 사람을 벌레 취급하지는 말아야지. 아무리 사슴벌레의 예리한 턱이 멋지고 어리호박벌의 붕숭붕숭 통통한 엉덩이가 애교 넘친다 해도... 하물며 벌레가 되지도 말아야지. 자유와 지성이 나에게 무엇을 시키건, 언제까지라도 마음을 사로잡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좋아하는 작품을 몇 개나 될지도 모르는 팔다리로 꼭 붙들고 뒹굴어야지...
- 2022년 어느 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