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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Feb 26. 2024

[게임] THE LAST OF US PART II

내 아이가 살아가기를 바라는 세상

2020년 7월 17일 작성

라스트 오브 어스 1, 라스트 오브 어스 2, 스펙 옵스 - 더 라인, 디스아너드, 바이오 쇼크 스포주의






 대중을 상대로 한 매우 위험한 실험이 맞이한 결말을 보면 이제 승부는 완전히 결정 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이번 리뷰에서 나는 일단 게임 외적인 것들과 작법적 부분에 대한 언급을 최대한 피하거나 뒤로 미루려 한다. 현재 이 게임이 비판받고 있는 부분 중에는 기술적인 것들도 포함되지만 이런 것들에 대해 따지는 것은 문제의 핵심도 아니거니와 가장 유치한 논쟁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 와서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일단 나는 현재의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 내가 해본 바로도 이 게임은 정말 넘어서는 안될 선들을 가차 없이 넘어선 문제작이며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음은 분명하다. 지난 2주간 정말 몰입했었고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이 작품을 어떤 마음으로 끝까지 진행할 수 있었는지 나 역시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불쾌감만을 얻게 될 것인가? 정말 마지막 신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이 이야기의 결말이 나에게 어떤 인상으로 남을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 작품은 파괴적이다. 자신이 쌓은 최대의 업적을 파괴했고, 대중의 기대를 파괴했고, 그로 인해 스스로도 파괴되고 있는 중이다.


 게임을 완료한 후 나는 수십 개의 리뷰와 기사들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리뷰들이 이 게임을 대하는 자세는 냉담했으며 거기에 달린 유저들의 리플은 분노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호의적인 몇몇 개의 리뷰들도 결국 다른 리뷰들과 같은 부분에서 이 게임의 실패를 지적했다. 당연하다. 현재의 이런 반응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나 또한 남 못지않게 전작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모든 플레이어들이 당혹해 했을 순간들에 똑같이 당황했다. 게임을 진행하기를 그만두고 싶었고 어떤 부분들은 억지로 플레이해야 했다. 그리고 왜 이 게임이 게임으로서의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선택지를 제공하지 않는지를 개탄하기도 했다. 엘리를 상대로 한 보스전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웠고, 뒤늦게 복수를 종용하기 위해 찾아온 너무나 변해버린 토미를 마주할 때는 제작진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애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디나를 두고 떠나는 엘리를 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 순간 내가 느낀 불쾌감의 정체를 이 게임을 해 본 이들은 모두 알 것이다. 그때 나는 내 몸속 내장이 썩는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올해 게임계 최대의 이벤트가 나에게도 가장 큰 배신과 실망으로 남을 것인가?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으며 아무런 선택지 없이 최후의 장소로 가는 발걸음은 먹먹하기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전편을 생각해 보자. 어차피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니 애먼 곳에서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말자. 대망의 엔딩에서 나는 엘리와 애비가 목숨을 건 격투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초조했으며 어떤 결말을 왜 바라고 있었는지를, 떠나가는 애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의 기억 속에 떠오른 조엘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 순간 이 게임의 엔딩은 내가 보아온 모든 이야기의 결말 중 가장 강렬하고 편안하고 안타까운 것이 되었다. 이 게임은 결코 두 명의 서로 만나서는 안될 복수자의 사투 이야기가 아니며 여전히 엘리와 조엘의 깊은 사랑 이야기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현재까지 이런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아마 한글을 쓰는 사람 중에서는 나 하나뿐인 것 같다. 조엘이 엘리가 보는 앞에서 맞이한 마지막 순간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지, 그리고 엘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복수의 여정을 시작했으며, 왜 안락함과 행복을 포기하고 최후의 장소를 찾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완료하지 않고 돌아와야만 했는지... 우리가 정말 조엘과 엘리를 사랑한다면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엄청난 이야기의 믿기지 않는 대 실패와 그 실패를 해부하는 논리 정연한 글들로부터 나는 정말 감당할 길 없는 비참함을 느낀다. 우리가 무엇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것을 얼마나 증오할 수 있는지를 표현한 이 작품 자체가 그런 현상의 대표 사례가 되어 불태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이제 심지어 자체적 종말을 통한 진정한 예술적 행위의 완성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이런 현상으로 인한 그야말로 몇 안 되는 수혜자 중 한 사람이 나라니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이 글이 끝날 때쯤엔 나 또한 예술가 병에 심취해 괴작을 만들어낸 삼류 개발자에게 낚인 한 명의 한심한 호구로 보일까? 가벼운 긴장이 생기는 것은 그 때문인지 아니면 이 믿기지 않는 예술적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충실감 때문인지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는 이 게임의 평가가 역전되는 순간은 현재로서는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 시련을 겪고 대가를 치른 애처로운 두 주인공을 이대로 끝없이 가라앉게 두기에는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지금부터 작성될 이 리뷰에는 이 작품에 대한 변호가 포함될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다고 하자마자 무거운 마음이 되었다. 그만큼 내 심정은 그야말로 앰비발랜트하다.


 우선 어떤 식으로 이 게임을 감상하더라도 반드시 합의되어야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짚고 넘어갈 것이다. 그 내용은 간단한데, 우선 1편에서 윤리적(혹은 정의적) 딜레마로부터 공리를 배신하고 개인의 행복을 거머쥔 조엘의 선택이 우리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는 것이 있다. 조엘은 인류를 구할 가능성을 버리고 자신이 사랑한 소녀 하나를 지키는 선택을 했다. 그 과정에서 조엘은 파이어 플라이 대원을 상당수 살해했으며, 그중에는 백신을 개발할 능력을 가진 유일한 인물인 의사 제리와, 엘리가 부모처럼 따르던 파이어플라이의 보스 마를렌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파이어플라이는 백신을 개발해 감염병을 퇴치하고 사회를 재건할 목적을 가진 조직이었으며 그 사건 이후로 힘을 잃고 해체되었다. 조엘은 엘리에게 거짓말을 했으나 엘리는 그 말을 믿는다고(표면적으로는) 말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이 사실들과 함께 합의해야 하는 것은 녹스의 10계나 반 다인의 20법칙 같은 어떤 창작물과 그 창작물의 소비자 사이에 지켜져야 하는 룰에 대한 것이다. 룰에 따르자면 게임 내에서 설명한 대로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면역자가 죽어야만 하고, 그 백신을 제작할 수 있는 인물은 세계관에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단 1명이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면역자 역시 1명이어야 한다. 그리고 백신을 만들 수 있는 인물은 거의 100%에 가까운 확률로 백신 제작에 성공해야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이 게임을 인정할 때 같이 인정해야만 할 게임 내 현재 상황이다. 만약 이것을 어기기 시작하면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던 1편의 엔딩과 모든 여정은 그 의미를 잃는다. 이러한 기술적 정리들이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고 그 룰을 다 따를 필요도 없지만 그 조항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공통적 목적만큼은 존중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감상자와 창작자가 서로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속임수나 억지를 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엘이 한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백신을 만들기 위한 검체 채취에 뇌 해부가 필요 없기 때문에 제리는 돌팔이 의사라든지, 더 찾아보면 세계 어딘가에 백신 개발이 가능한 의료 장비나 스태프들이 더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든지 하는 주장들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유치한 생트집이다. 이런 식의 논리면 면역자도 1명이 아닐 가능성이 거론될 수 있고, 파이어플라이와 같은 목적을 가진 조직들이, 혹은 이미 그 목적을 이룬 조직들이 세계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가정도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결국 온 세상과 바꾼 단 하나의 사랑이라는 명제가 그 강력한 힘을 잃게 된다. 여기저기 널려 있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은 면역자와, 면역자를 죽이지 않고도 검체를 채취해서 배양할 수 있는 장비와 그걸 다룰 수 있는 의료진들. 이러한 가능성들이 있다면 전편에서 조엘이 했던 윤리적 고민은 그다지 무겁지 않은 것이 된다. 정말 그것을 바라는가? 사실 나는 이 문단 자체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앞으로 이런 종류의 트집은 가급적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1편의 이야기는 온갖 참혹한 상황들을 견뎌낸 후 의외로 동화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정말 그랬을까? 1편이 명작으로 등극한 가장 큰 이유는 이 모든 제반 설정들과 극명히 대비를 이루는 고전 동화 같은 엔딩에 있다. 때문에 이 엔딩은 비디오 게임 역사상 가장 완벽한 결말로 신성시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만약 2편이 개발되지 않았다면 조엘과 엘리는 팬들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평화롭게 서로를 위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자면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나는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가 1편 결말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1편을 완벽히 보완하기 위해 감행된 매우 위험하고 처절한 해체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해체주의적 목적성을 가지고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물리적인 의미로도 진정한 해체주의의 끝을 보여주고 있으니, 너무 위험해서 자기 자신을 원상복구가 불가능할 만큼 해체하고 있는 이 상황까지 감수할 정도로 전달되어야만 할 메세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평론가들과 유저들 이야기 대로 복수의 허무함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불쾌한 가르침이었을까?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전편의 감동적 엔딩은 윤리적 딜레마를 초월하는 것에서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이 게임은 전편에서 남겨진 윤리적 딜레마를 극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편의 결말을 뒤돌아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명백하게 말해서 그때 우리 모두는 조엘이었다. 우리가 한 행동들은 정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격이 있는 것이었을까?


 일단 조엘에게 우리가 아무리 몰입했다 한들 조엘이 언제 죽어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업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엘리의 말대로 조엘은 적이 많다. 누구에게 원한을 졌는지 추적하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런데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랑받는 캐릭터에 대한 예의 있는 죽음이란 것이 정말로 라스트 오브 어스라는 세계관에서 반드시 필요한가? 그런 영웅적 죽음은 조엘이라는 인물과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그가 그동안 쌓아온 업보와도 결코 맞지 않는다. 이 게임은 어벤져스가 아니며 조엘은 아이언맨이 아니다. 좀비 아포칼립스 시대에 인간으로서는 해서는 안 될 일을 몇 가지 남기지 않고 해 온 인물에게 이런 죽음은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여러 리뷰들을 살펴본 바 여기까지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수긍하는 편이다. 나도 꽤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복수를 준비했다.



내가 엘리에게 배신당한 이 순간 엘리는 조엘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 게임이 대중적으로 실패한 최초의 지점은 아마도 조엘의 사망이 아닌 엘리와 조엘의 반목이 시작되는 장면부터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으로 인해 유저들의 불쾌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애비 파트를 거쳐 엘리와의 보스전에서 그 불쾌감은 극에 달했고(심지어 이것도 끝이 아니었지만...), 그로 인해 조엘의 죽음조차도 납득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나 또한 이 순간 쓰라린 배신감을 맛보았다. 전편의 엔딩에서 나는 우리가 한 일들에 대해 합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 되었고 만약 그 일이 도덕적으로든 정의적으로든 어떠한 형태의 '범죄'라면 그것은 오로지 나 혼자만의 단독범행이 되었다. 유일한 내 편이자 공범자인 줄 알았던 엘리로부터 버림받는 순간이었다.


 황망하고 난처한 순간이 지나고 나서 정신이 좀 들자 나는 엘리와의 1편 마지막을 되새겨 보았다. 전편의 신화적 엔딩은 깨졌다. 그리고 이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백해졌다. 조엘은 개인적 욕심을 위해 인류사에 남을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고 엘리는 단지 어린아이이며 내가 그 범죄로부터 나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한 것은 합리화에 불과하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사랑이란 명분으로 아름답게 포장했던 도덕적 딜레마는 들추어졌다. 그 순간 이 게임이 가진 메타 게임적 그리고 내러티브적 목적 중 한 가지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일단 잘 알려졌다시피 이 이야기는 순환되는 복수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도 더 중요한 두 가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 진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한 행동과 그 결과의 정당성에 대한 고민"이다.



가장 어려운 결정을 했을 마를렌. 조엘에게 호의를 베풀어 살려주는 바람에 조엘의 손에 죽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이 게임의 전편을 더없이 사랑하는 나와 아내는 전편의 등장인물들 중 가장 비극적 인물로 마를렌을 꼽는다. 우리는 항상 같은 게임을 하거나 책, 혹은 영화를 보고 나면 그에 대한 의견을 말과 글로 나누는데 엘리와 조엘을 정말 사랑하는 나와 내 아내는 두 주인공의 해피 엔딩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엘리를 희생시키는 결정을 해야만 했을 마를렌의 입장도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며, 불가피한 이유였다고 해도 그런 마를렌을 죽이고 마를렌이 공들여 준비한 인류를 위한 계획을 완전히 망쳐버린 조엘이 타자적 입장에서는 명백히 중범죄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에 있어서 이것은 말 그대로 불가피한 일이었다. 각자의 이유 때문에 마를렌과 제리는 불가피하게 엘리를 수술대에 눕혔고 조엘은 불가피하게 그들을 살해했다. 엘리의 입장은? 나는 지난 라스트 오브 어스 1편 리뷰에서 몇 가지 징후를 통해 엘리가 목숨을 포기하고 스스로 수술대에 누웠다고 결론지었다. 1편만 놓고 생각해 보자. 조엘의 거짓말을 알면서도 캐묻지 않고 동의해 주는 생각 깊은 엘리가 본래 자신이 맞게 될 운명도 몰랐을까?


 이 '불가피함'으로부터 애비가 탄생했다. 지금은 모두가 증오하는 대상이지만 애비는 꽤 성실한 인물이다. 군인으로서 능력도 뛰어나고 복수라는 목적을 위해 연애도 뒤로한 채 혹독한 트레이닝을 견디며 복수에는 복수로 은혜에는 은혜로 답한다. 이 단순 명료함으로부터 시작된 애비라는 인물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복잡한 양상을 띄는데 이런 부분은 인정할 사람은 인정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증오할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플레이어들의 자유다. 단지 인물들이 가진 일관성이 이 이야기 안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과연 완전히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물들의 일관성은 어디까지 지켜져야 하고 어디에서 변화해야 할까? 둠에서 둠가이는 끝까지 적을 찾아 찢어 죽여야만 한다. 그러나 라스트 오브 어스 1에서 조엘과 엘리는 변화했었다. 단순한 배송품과 보디가드였던 엘리와 조엘의 관계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가장 강력한 사랑으로 맺어진 가족으로 변화했다. 이번 작품에서 애비는 복수를 마친 후 방황을 겪는다. 당장 목적을 완수했지만 그러고 나서 뒤돌아 보면 그동안 돌보지 못해 소원해진 관계들뿐이다. 그 상황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적과 아군 사이에 끼어, 친구와 전 연인 사이에 끼어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자신만의 안식처를 찾아 도피한다. 이런 애비의 이야기는 시간차를 두고 진행되는 복수를 마친 엘리의 미래 모습을 예상케 한다. 이 이야기가 흔히 알려진 대로 증오와 복수에 대한 내용이더라도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결코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게임을 플레이한 모든 유저들은 후반부 토미의 변화를 통해 또 한 번 큰 배신을 겪는다. 이때는 정말 개발팀의 의도가 의심되고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토미는 조엘과 마찬가지로 엘리를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토미는 조엘이 죽고 나서 복수를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엘리를 감금을 시켜서라도 마을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라고 마리아에게 부탁하고 혼자서 복수의 길을 나선다. 이 부분에서 토미가 한 행동의 모순을 지적하는 리뷰도 있던데 정말 기가 막힌다. 세상에 어떤 삼촌이 조카에게 부모 복수를 하라고 부추기겠는가? 생각을 해 보자. 내 형이 죽었다고 형 딸과 함께 복수의 여정을 하겠다는 정신 나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를 말이다. 나는 형의 복수를 하러 떠나서 죽을 수 있을지언정 이미 죽어 없어진 형의 딸까지 그런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토미는 엘리에게 거짓말을 하고 혼자 떠났고, 결국 애비에게 총상을 입어 얻게 된 영구적 신체장애를 가지고 몇 년을 산 후 추하게 변한다. 토미의 이런 변화에는 설명할 길 없이 실망스럽지만 어쩌겠나... 어쨌든 토미라는 또 하나의 멋진 캐릭터는 그렇게 변했고, 나는 복수를 포기했다. 여기에서 만약 선택지가 있었다면 나는 디나와 함께 눌러 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결말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아쿠아리움 이후 엘리와 토미는 복수를 포기하고 잭슨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혹자에 따르자면 토미는 몰라도 엘리가 복수를 포기한 것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한 혐오감과 복수라는 행위의 허망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사실도 모른 채 험한 세상을 살아가던 엘리였을까? 복수가 허무하고 무상하기에 포기했다? 똑똑한 엘리가 이제 와서 깨닫기에 이것은 너무 진부하고 추상적이다. 엘리가 알게 된 것은 그런 모호한 것이 아닌,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이다. 엘리는 복수의 여정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통해 과거 자신들이 했던 일과 그로 인해 일어난 일의 인과를 이해했다. 원한에 의해 자신이 쓰러트린 시체들을 보면서 조엘의 죽음에도 불가피한 이유가 있음을, 정말 마음 아프지만 그 참혹한 최후에 당위성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위성 안에 원래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어야 했음을 이해한다. 이때부터 엘리의 복수심은 조엘에 대한 갚을 길 없는 죄책감으로 바뀌어 간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두 방향으로 자란다.


 엘리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순간을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의 눈빛만 보고 내 마음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이 어찌 보면 우습게도 느껴진다. 물론 전편만 놓고 보자면 그럴리야 없겠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이것은 착각도 아닌 이기적 선택에 대한 합리화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래서 배신을 한 엘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론 사랑한다. 엘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저질러버린 그 사건으로 인해 조엘은 몇 년간 엘리와 기타도 치고 박물관도 탐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조엘에게 그 몇 년간은 세상이 변한 이후의 모든 시간들과 비교도 안될 만큼 정말 살 만한 가치가 있는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건이 엄청난 죄라고 할 때 엘리가 공범자가 아니면 뭐 어떠랴? 오히려 잘 됐다. 그 죄로 인해 언젠가 찾아올 최후는 나 혼자만 각오하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엘리가 나를 미워하게 된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조엘에게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그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운 채 마지막 날 밤에도 나쁜 말을 하고 떠나보낸 엘리는 애비에 대한 복수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애비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애비의 플레이 파트가 흥미롭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나 또한 애비에게 감정이 이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솔직히 후반부는 그 파트의 필요성과 상관없이 좀 너무 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비 파트를 단 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무난히 플레이했는데, 그 이유를 나 스스로는 재미있게 생각한다. 애비로부터 몰입이 깨지는 나중에야 알았지만 나는 조엘의 입장에서 애비를 플레이하고 있었다.


 이미 엘리 파트에서 복수를 포기한 내가 애비 파트를 시작할 때 가진 궁금증은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과연 엘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복수의 성패 여부가 문제가 아니고 생존에 대한 문제였다. 그래서 애비로 플레이하는 엘리 보스전이 정말 지독한 곤욕이었던 것이다. 결말이 어떤지도 모른 채 엘리와 격투를 벌이는 이 보스전의 의도가 변태적 수준의 고문 욕구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에는 반박할 말이 없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나 역시 이 짓을 대체 왜 해야 하나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엘리와 디나는 살아남았고, 토미도 살아남았다. 토미는 굳이 살아남았으므로 인해 나중에 우리에게 더 쓴맛을 보여주긴 하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과연 나를 죽인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즉 조엘의 입장에서 나는 애비를 플레이하며 관찰했다. 내 부모와 동료, 친구들을 살해하고 내가 속한 조직이 목표로 하던 것을 영구히 달성 불가능하게 만들어서 조직마저 와해 시킨 상대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복의 위험이 남음에도 불구하고 제거하기로 한 목표 이외의 대상은 죽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군인다운 원칙주의가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 최대의 목표를 달성 한 이후에 오는 허무함과 방황, 그 때문에 미루어 두었던 관계와 갈등들을 봉합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모습은 매력적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억지스럽지도 않다. 그러나 애비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든 유저들의 페르소나이자 그에 앞서 디렉터의 페르소나였던 조엘을 죽인 죄로 증오 받고 있으며, 그로 인해 현실 세계에서까지 말 같지도 않은 촌극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본 게임의 일부 팬들은 본인들이 사랑하는 원작과 캐릭터들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애비의 도덕성과 애비가 한 행동의 일관성을 분해하며 비판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과거의 많은 고문 기술자들과 살인자들이 얼마나 가정과 이웃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으며, 평범한 사람이 얼마나 선택적으로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도대체 언제까지 뉴스에 보도되는 실제 사건들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는지 모르겠다. 전장에서 수없이 적을 사살한 군인들도 일상생활에서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결코 쉽게 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과 그 목적의 적합성은 항상 그 행동의 원인과 연관 지어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캐릭터에 대한 증오는 완전히 도를 넘어 행동의 동기에 대한 판단은커녕 심지어 애비 성우는 살해 협박까지 받고 있다고 하는데, 지난번 일본 쿄애니 방화 사건을 생각하면 이제 이런 것도 단순히 촌극으로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조엘의 입장에서 애비를 플레이하고 나니 나 역시 머리가 깨졌기 때문에 아버지와 친구들을 죽인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엘리를 살려준 것만큼은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바란 것은 단지 엘리가 죽지 않고 완전한 악인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엘리는 아직 마음속에 맺힌 것들을 풀지 못했다. 디나와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지만 마음속에서는 조엘의 마지막 모습이 떠날 날이 없다. 평화로운 일상으로 덮여 있지만 엘리의 마음은 혼란한 상황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1편의 결말이 우리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지금 돌아보면 1편의 결말이야말로 있을 수 없는 환상에 가깝다. 엘리는 마취에서 깨어났고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조엘의 말만 믿고 같이 잭슨으로 돌아왔으며, 그 이후로도 파이어플라이의 자취를 쫓았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였고 어렸을 때부터 부모처럼 따랐던 마를렌은 어떻게 된 것일까? 조엘이 죽인 것일까?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랐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엘리는 파이어플라이의 계획과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조엘의 옛이야기 속 여유로운 호텔 커피숍에 끼어 앉아 지난날을 이야기할 가능성은 조엘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엘리는 이런 일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분노했고, 그 분노는 조엘과의 관계마저 끊고 싶게 만들 정도였다. 그런데 애비 역시 똑같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엘을 찾아오게 된다. 엘리가 복수를 위해 걸음을 옮길수록 그날 조엘이 한 행동은 더욱 또렷이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조엘에게 혼자 지게 한 죄의 무게가, 그 죄를 범하면서까지 지켜낸 자신의 목숨의 무거움이 구체화된다. 그래서 엘리는 애비를 죽일 명분이 없다. 그러나 그 업보를 혼자서 모두 안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 겨를도 없이 죽어버린 조엘을 그냥 둘 수도 없다. 그래서 엘리는 애비를 어떻게 할 마음도 정하지 못한 채 그저 찾아 나선다.


 그 이후부터 엔딩까지 우리가 경험한 것이 엘리가 이미 죽어버린 조엘을 위해서 한 일들이다. 그리고 이 작품의 진정한 목적이다.


 엘리는 두 가지 죄책감을 떨쳐내야 했다. 조엘의 복수를 위하여 애비를 한번 죽이고, 조엘과 공범자가 되기 위하여 애비를 죽이지 않는다. 조엘이 했던 일들이 끔찍한 보복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엄청난 중범죄임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생명을 건진 본인을 그 범죄의 가해자로 편입시킨다. 애비를 살려 보냄으로 인해서 1편 엔딩에서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확실한 끄덕임으로 바뀐다. 이 여행을 통해 겪은 모든 고통과 잃어버린 두 개의 손가락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조엘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미안함과 사과의 대가로 지불되었다. 그리고 조엘의 목숨을 빼앗은 에비를 살려 보냄으로써 전편에서 남겨졌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성의 있는 위로를 건넸다.



결국 같은 이야기



 이 사투를 모두 끝내도록 엘리는 죽지 않았고, 악인이 되지도 않았다. 그제서야 만신창이가 되어 비참하게 죽은 조엘은 엘리의 기억 속에서 좋았던 모습으로 돌아와 말한다. "신이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다시 한번 그날 밤으로 돌아가 보자. 만약 기적이 일어나서 모두가 증오하는 애비가 자비를 베풀어 마지막 말을 남길 수 있게 해주었다면 조엘은 어떤 말을 했을까? 살려 달라고 구걸했을까? 아니면 엘리에게 복수의 다짐을 받아 냈을까? 절대 있을 수 없다. 이런 일들은... 아마도 단 한마디만을 남길 수 있었다면 조엘은 애비에게 엘리를 보내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의식이 아직 조금 남았다면 엘리에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죄로 인하여 죽는 것이니 절대로 복수하지 말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지금 이 순간이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지난 몇 년이 꿈같이 행복했었다고...





 자. 이 엔딩이 정말 배드 엔딩인가? 엘리는 자신의 목숨에 지워진 업보와 도덕적 부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찾아올 복수자는 없고 디나에게는 돌아가면 그만이다. 기타는 놓아두고 떠나지만 나중에라도 가끔 조엘이 생각날 때 칠 수는 있다. 엄지로 루트를 잡고 검지로 토닉을 잡고 중지로는 3도나 7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남은 손가락 세 개를 잘 이용해서 뮤트에 주의하면 싱글노트도 칠 수 있다. 조엘은 아무 의미 없던 삶에서 마지막 몇 년을 엘리와 함께 행복하게 보냈다. 그리고 엘리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채 잠들었다. 이 이야기가 더 이어진다면 아마도 엘리는 이제 조엘도 없겠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자신의 뇌로 백신을 만들 궁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목숨을 바쳐 인류를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이제야말로 얼마 남지도 않았을 팬들의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것이 이 해피엔딩의 유일한 단점이다.












 이 놀랍고 근사한 이야기는 전해질 길이 없어서, 두 명의 애처로운 주인공의 간절한 마음은 외면받았다. 소니가 자랑하는 최고의 ip 이자 게이머들의 자부심이었던 이 작품은 왜 스스로 외면받는 길을 택했을까? 게임이 하나의 예술이라고 칭하던 사람들조차 경기를 일으키게 만드는 예술적 도전은 도대체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 게임이 현재 이런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유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명백하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위해 설계되었고 그 목적을 지나칠 정도로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도대체 이런 무모한 짓거리가 왜 시도되었으며 심지어 성공까지 해서 이 사달을 낸 것일까? 이러한 일들에 대해 알려면 사회적 인식에 대한 게임업계의 아킬레스건인 루도 내러티브 부조화 이야기를 꺼내야만 한다.


 그러나 지긋지긋하게 이어질 이 이야기의 결론은 사실 한 장의 그림으로 요약이 가능하다.





 구글에 '취미 게임'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여러 이미지들 중에 한 장이다. 누가 무슨 근거로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이런 이미지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느냐마는 보통 게임 관련 커뮤니티나 남초 커뮤니티 등에 자조적인 유머의 소재로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이런 짤방들에 대한 반응을 보면 게임을 하는 당사자들조차 이 표가 나타내고자 하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임은 왼쪽 아래에 있는데 품위도 없고 간지도 나지 않는 취미에 속한다. 게이머들은 골방에서 오랜 시간을 혼자서 보낸다. 예로부터 하드코어 게이머들은 아싸이거나 덕후여서 비활동적이며 폐쇄적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성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폐쇄적 소비행위는 결코 좋은 시선을 받을 수 없다. 결국 존재의 기본 조건이란 자신이 소비하는 것 이상을 생산하는 능력으로부터 보장되는데, 천연자원이라도 콸콸 나오는 복지국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죽을 때까지 이 의무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기 때문에 기존 사회는 이러한 폐쇄적 소비행위에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생산성이 없는 행위는 좋은 시선을 받기 힘들며 지금은 게임이 그 대표적 사례다. 스마트폰의 보급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요즘이라고 해도 게임은 결코 권장 받는 취미가 아닌 것이다. 기존 사회에 있어서 게임은 여전히 유치하고 소모적이며 중독적이고 폭력적이다. 때문에 자녀를 가진 학부모들에게 게임은 영원히 골칫거리이며 가정의 적이다.


 유치하고 소모적이며 중독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말은 곧 매우 재미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누가 권장을 하든 말든 젊은 세대는 게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대략적 실루엣을 멀리서 보자면 어떤 게임이건 비슷해 보인다. 결국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서 상대를 쓰러트린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시간과 돈, 에너지를 투자해 가상 공간에서 폭력행위를 한다. 즐거움을 얻자니 얼마나 좋은가? 사람은 끝없이 즐겁고 싶으니 말이다. 이 폭력 행위들은 공교롭게도 게임 안에서 최대로 효율을 발휘하는데 그렇다고 그 책임을 게임이라는 매체에게 묻는 것은 사실 불공평하다. 알다시피 인류는 원래부터 싸움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루도 내러티브 부조화란 하는 행동과 목적이 일치를 보이지 않는 게임의 특성에 대해 말한다. 게이머들은 온갖 선한 목적 때문에 폭력을 사용하고 살인을 저지른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거북이를 짓밟고, 유적을 발견하기 위해 유적을 파괴한다. 우리가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가 얼마나 지긋지긋할지 감이 잡히는가? 이것은 게임의 태생적 특질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현상의 해석은 결국 '총(혹은 폭력)은 곧 돈이다.'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를 좀 더 자세하게 다루자면, 전투라는 것이 하나의 문제풀이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게임은 재미가 있어야만 하며 재미가 있으려면 무언가 해결할 문제가 있어야 한다. 출제할 수 있는 문제의 방식은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전투는 매우 직관적이며 제작비용도 싸고 큰 성취감까지 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한 방식으로서 인기가 높다. 거기에 삶과 죽음이 필수로 따라붙으니 감정과 드라마를 만들기에도 더없이 좋다. 그러니 게임은 폭력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게임이란 폭력 없이는 성립이 불가능한 것만 같다. 그래서 최소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블록버스터 게임들은 이런 공식들을 안전하게 따르고 있다.


 자. 바로 이것이 문제다. 전투를 기반으로 하는 게임 플레이라는 것이 풀어야 할 문제인 만큼 당연히 해결 능력이 필요하고, 지능이 높을수록 게임도 더 잘 하게 된다. 프로게이머 페이커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적을 타겟팅하고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움직임을 할 수 있는 것은 손과 뇌가 처리된 정보를 빠른 속도로 주고받으며 실수 없이 정교한 동작으로 연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작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외과의사나 피아니스트의 작업들을 연상케 하는데, 최소한 게임을 멀리서 보자면 게이머들은 그 능력을 이용해서 오로지 가상의 캐릭터를 죽이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성시하는 라스트 오브 어스 1편을 예로 들어 볼까? 과연 이 게임을 하루 종일 하고 있을 자녀를 지켜보는 부모는 비명을 질러가며 사람과 괴물을 총으로 쏘고 몽둥이로 두들기게 하는 이 게임을 어떻게 생각할까?


 사회가 어떻게 생각하건 이성이 어떻게 생각하건 내가 즐거우면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그로 인해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받는 대우를 생각해보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거 mbc에서 행해진 폭력성 실험을 다들 기억할 것이다. 이 최소한의 논리도 없는 실험은 명백히 그 대상이 게임이기 때문이 행해졌다. 게임은 중독적이라 플레이 가능한 시간을 국가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며, 총기난사나 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항상 우선적으로 게임이 거론된다. 과거 프로게이머 임요환이 tv 프로에 나가서 치른 곤욕을 보면 아직도 민망함에 헛웃음이 나온다. 게이머들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이 모든 일들은 오로지 그 대상이 게임이기에 일어난 것임이 명백하다. 이럴 때마다 게이머들은 기가 찰 것이다. 누가 가상과 현실을 구분도 못한단 말인가? 게임은 단지 게임일 뿐인데...



전혀 다른 게임성을 가진 이 두 게임의 아트와 스크린샷이 게임을 잘 모르고 앞으로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사실 알고 보면 게임이 단지 게임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도록 만드는 원인이다. 권위도 생산성도 없는 말초적 오락거리에 젊은이들의 정신과 시간이 매몰된다는 우려가, 기존 사회가 게임을 증오하고 배척하는 적절한 근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노한 유저들이 원하는 대로 게임은 예술이 아니기에 게임 업계에는 이런 대우에 반박해 줄 만한 대변자도 없다. 정말 이대로 만족하는가? 게임은 앞으로도 그냥 오락거리에 머물러야 할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사회의 물음에도 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답변에 우리가 더 나아지는 것에 도움이 되는 생산성이 포함되어 있어야 게임과 게이머들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푸대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지옥 같은 간지와 품위 그래프의 구석에서 최소한 정 중앙 부분으로 가기 위해서, 말 그대로 창작물의 궁극적 목표인 예술성과 문학성이 언젠가는 획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필수적으로 사회가 게임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하는 치명적 단점에 대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자체적인 성찰은 전례 없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통해서 시도되었다. 소비자에게 돈을 내고 불쾌감을 사라? 이런 건 사실 무리한 요구다. 하루 종일 총을 쏘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을 즐기는 친구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 거지?


 루도 내러티브 부조화는 게임에 있어서 정말 다루기 어려운 치명적인 약점임과 동시에, 어찌 보면 게임의 위상을 다음 단계로 견인할 수 있는 유력한 실마리 인지도 모른다. 이 부조화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며, 불쾌감을 재미 속에 내포했던 여러 게임들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었다. 그러나 너티독은, 그리고 본 게임의 디렉터인 닐 드럭만은 아마도 이 개념에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플레이스테이션을 대표하는 명작 액션 어드벤처게임 언차티드 시리즈가 이 부조화의 대표 사례로 항상 지목당해왔기 때문이다.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모험가 네이선 드레이크는 모험의 과정에서 수많은 살인을 저지른다. 그의 아내도 살인을 저지르고 형도 저지르며 나오는 친구들은 사실 다들 살인범이자 악당들이다. 문제는 이 게임이 우리가 흔히 꿈꾸는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지 사이코패스 살인 패밀리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로 따지면 인디아나 존스와 비슷한 포지션에 있다고 봐야 할 이 게임에서 유적을 찾아 모험을 떠난 주인공 네이트와 친구들은 익살을 떨어가며 사람을 많이도 죽인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인디아나 존스를 촬영하던 당시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 역시 이런 이유로 마찰을 빚었다고 알려져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모험 영화에서 적이건 아군이건 죽는 사람은 가급적 없는 것이 좋다는 입장이었고, 조지 루카스는 악당들이 죽는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유적에서 사람 죽이는 능력으로는 경쟁자인 라라 크로포드 역시 네이트에 뒤지지 않는데, 심지어 지금은 "저 여자가 우릴 다 죽일 거야."라는 대사가 라라를 대표하는 밈으로 인터넷상에서 그녀의 위엄을 상징하고 있다. 나는 툼 레이더 역시 1편부터 즐기던 골수 팬이었는데, 처음 티베트의 동굴에서 박쥐와 늑대를 상대로 쌍권총을 쏘던 때를 생각하면 확실히 지금의 라라는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다. 유적을 탐험하다가 불가피한 상황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 오히려 사람을 죽이러 갔더니 그 자리에 유적이 있어서 발견하는 것에 더 가까운 레벨 디자인을 보여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라이즈 오브 툼 레이더에서 구현된 전투는 정말로 재미있다. 네이트와 엘리보다 더 숙달된 킬러로 묘사되어 있는 라라를 플레이하는 것에 나는 충분히 만족했지만, 이제 더 이상 유적 탐험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툼 레이더의 최신작을 구매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HOTLINE MIAMI



 이 찜찜한 불쾌감 실험은 핫라인 마이애미 같은 게임에서는 가볍게 시도됐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지르러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건물을 방문해서 신나는 음악에 맞춰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스테이지 안에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없게 되면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감상하며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온다. 디스아너드나 페이블에서는 자신이 한 행위로 인해 게임 속 세상과 플레이어의 평판이 변화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라스트 오브 어스 1편 못지않은 명작 게임인 디스아너드에서는 살인을 거듭할수록 거리에 시체와 쥐과 들끓고 제국은 흉흉하게 변해간다. 이 게임에서 살인자로서 도달한 마지막 스테이지에서 뱃사공의 돌발 행동에 순간적으로 내가 저질렀던 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게임 역시 1편에서 폭력을 최대한 절제한 결과가 후속작에 반영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2편에서 제국의 후계자 에밀리는 1편의 주인공인 코르보와 같은 암살자의 삶을 산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No Russian' 미션이나 'Death from above' ac-130 폭격 미션들 역시 게임과 현실 세계 사이의 폭력성의 관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었다. 게임 속 공항에서 민간인에게 총을 난사하는 것은 단지 게임이기에 허용되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폭격기 승무원들은 게임을 하듯이 멀리서 리모컨을 조종해서 단지 음영으로만 표현된 살아있는 표적에 폭격을 퍼붓는다. 폭격기 승무원들은 본인들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것을 정말로 자각하고 있을까?



call of duty - modern warfare의 death from above 미션 플레이 화면. 실제 폭격기 승무원들도 이런 화면을 보며 적을 공격한다.



 그 후에 이러한 불쾌감 실험은 '스펙 옵스 - 더 라인'에서 꽤 본격적으로 시도된다.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속'을 각색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 게임은 노골적으로 우리가 한 행위의 이유와 목적을 묻는다. 정말 어떤 사명감 때문에 총을 쏜 것인가? 아니면 단지 재미로 쏜 것인가? '적'은 총을 맞을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아무런 가책 없이 죽여도 되는 '적'이 오로지 게임적 재미를 위해 필요했던 것인가? 단 여섯 시간 분량의 이 게임은 조금 부족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충격적 민간인 학살 연출로 루도 내러티브 부조화 실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위치를 이어받게 된 라스트 오브 어스 2는 이런 측면을 더욱 깊게 다룬다는 점에서 문학적 면모를 가지고 있다. 자기 정체성을 고찰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을 과감히 파괴하고 파괴된 부분을 자신이 속한 문화계 공통의 아킬레스건에 대한 답변으로 내놓는다. 간단히 말해 조엘의 죽음을 빌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죽을만한 일이었음을 난 알아." 게다가 팬들을 위해 감동적인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아. 골프채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같은 일을 할 거야."



SPEC OPS - THE LINE



 이런 정체성에 대한 자기반성은 마치 과거 예술로 평가받았던 또 다른 명작 게임 바이오쇼크가 게임성을 넘어서서 문학성을 획득한 부분과도 닮아있다. '게임이 과연 정말로 흥미로운 선택의 연속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 게임이 내놓은 대답에 의하면 게이머들에게는 그다지 선택지가 없다. 지금까지도 많은 게임들이 단지 지도상에 나열되는 물음표와 느낌표 만으로 게이머들의 행동을 자동화 시키듯이, 이 게임 안에서 'would you kindly?'라는 한 문장만을 가지고도 게임 제작자는 플레이어에게 무슨 짓이든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롱당한 플레이어들은 공교롭게도 인간과 노예를 들먹이며 이 모순점을 지적하는 게임 속 인물 앤드루 라이언을 골프채로 때려죽이는 불쾌한 경험을 하도록 강제되었다. 비록 게임 속에 있지만 자신이 인간이라 주장하며 죽음을 선택한 앤드루 라이언의 최후에 현실 세계의 플레이어들은 노예로서 복종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던 것이다. 게임이 자랑하는 다른 매체와의 차별점의 한계를 지적하는 이 장면이 라스트 오브 어스 2와 다른 점이라곤 단지 앤드루 라이언은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순점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본 죄로 라스트 오브 어스 2는 골프채에 맞아 파괴되고 전시되어 조롱당했다. 거울 속에 있었던 것은 나음과 못함을 포함한 온전한 자신의 모습이었을 뿐, 이 시도에는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결론도 없었다. 단지 한 문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타이틀로서 현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지난 일에 대해 반성을 좀 했을 뿐인데 분노한 유저들은 대체 어디서 얼마나 훈계를 듣고 살았는지 몰라도 밑도 끝도 없이 이 게임이 무언가를 가르치려 한다는 말만 끝없이 반복하고 있다. 이 게임의 전편을 예술이라 평가하며 게임이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추켜세우던 이들은 이제 와서는 게임은 단지 게임일 뿐이니 예술적 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며 분노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내가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 두 가지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집단이 완벽히 다른 사람들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는데, 어쨌든 최소한 게이머들이 말하는 라스트 오브 어스 1이 예술 작품이라면 그 후속편에서 어떻게 예술적 시도가 자제되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말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진짜 한심한 소리는 하지 말자. 세상 모든 창작물은 각자의 의도가 있으며 그 내용은 창작자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없는 창작물은 있지도 않고 있더라도 별 가치도 없다. 어떻게 남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이야기에 아무런 의도나 개인의 견해가 없기를 바라는가? 이런 무미 무취의 글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겐 실험 보고서나 제품 매뉴얼, 신문 속보를 읽을 것을 추천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정치적이건 뭐건 간에 어쨌든 이 게임이 주장하는 올바름이라는 것은 있는데, 그것도 단지 자신이 한 일과 그로 인한 결과와 책임에 대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얼토당토않은 교조주의와 pc 프레임이 씌워지며 이 작품은 논의될 모든 기회를 잃고 있다. 세상에, 엘리는 숏컷에 레즈비언인데 육아에서 남자 역할이라 pc고 애비는 덩치와 외모가 남자 같아서 pc, 레브와 야라는 그냥 대놓고 pc란다. 정말 이런 것들이 사실로 생각되며, 설령 사실이라 한들 이 게임에서 그렇게 중요한가?


 무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증오하는 불공정함은 나의 기억 속에서 아주 어두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 경험이 역겨운 이유는 이것이 실제 일어난 일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에 있다. 내 가족과 싸웠기 때문에 상대를 미워한다. 모든 과실이 내 가족에게 있고 상대가 결백하다 해도 소용없다.


 이 긴 이야기도 이제 드디어 마칠 때가 되었다. 작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자유이듯, 그것을 증오하고 외면하는 것 역시 감상자의 자유다. 과거 아서 코난 도일이 셜록 홈즈를 죽였다가 살렸듯이 팬들에게 사랑받는 캐릭터가 온전히 작가 개인의 것이 아님도 이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엘과의 갑작스럽고 참혹한 이별에 놀라고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게임은 분명 팬들에게 미움을 살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번 작품에서 조엘과 엘리의 마음을 전편에서보다 더욱 강하게 느꼈다. 애비의 이야기마저도 엘리의 마지막 여행을 위한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을 정도다. 그리고 내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엘리는 마지막까지 정말 조엘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게임은 현재까지도 게임 출시 전부터 있었던 몇 가지 이슈들과 함께 불태워지고 있는데, 해커의 스토리 유출과 디렉터의 트윗, 코로나로 인한 발매 시기 연기 등등 땔감도 많다. 하지만 현재 상승하고 있는 유저 스코어가 증명하듯 분명 진지하게 오랫동안 감상하면 정말 훌륭한 부분이 많은 작품임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저 스코어 상승이 조작이라고? 글쎄 잘 모르겠지만 이 게임을 증오하는 사람들 만큼이나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누구 하나라도 비밀서약을 어기면 의뢰자에게 치명상을 가할 수 있는 평점 조작이 과연 정말로 일어날 수 있을지가 사실은 의문이다. 이 게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현재 주요 커뮤니티에서는 완전히 금지된 상태인데, 내가 살펴본 바로는 부정평가 50개에 긍정 평가 하나 정도가 달리고, 긍정 평가에는 여지없이 부정평가와 비추가 줄을 잊는다. 심지어 긍정평가자는 닐 드럭만의 교조주의 메신저로 몰려 맥락 없는 비판을 받기 일쑤다. 얼마 전 한 유명 스트리머는 이 게임에 대해 긍정적인 발언을 했다가 항의 메일을 받고 사과문까지 올렸을 정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작품이 현재까지는 심도 있게 논의되지 못했음을 나는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 글 역시 여전히 이 작품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정성스레 길게 쓴 개소리'나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열혈 지지자의 마스터베이션'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 또한 사적 공간에 이 글을 올린 만큼 그런 의견은 무시하련다. 끝으로 엄청난 용기로 시도된 이 작품을 위해 소설가 스티븐 킹의 충고를 인용하며 결국 가벼운 마음은 전혀 가지지 못했던 이 리뷰를 마친다.


 "나는 매주 한 통 이상의 항의 편지를 받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검열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는 창조적 직업을 가질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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