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존심 도둑에게 고하노니

그 많던 자존심은 누가 다 가져가 버렸을까?

by 푸들

“아이구 우리 딸이 벌써 그런 것도 혼자 다 알아냈단 말이야? 똑똑하네~”


“이러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 나오겠어요!”


“넌 분명히 잠재력이 있는 아이야. 다만 제대로 된 도움을 못 받아봤고 또 의지가 약해서 그렇지. 선생님이 도와줄 테니까 열심히 해보자.”


이 모든 칭찬은 ‘한 사람’ 앞으로 쏟아진 것들이다. 그리고 이 칭찬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본인 기준에서 ‘절대’ 안 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뭐든지 해주고자 했던 아빠의 영향으로 원하는 것은 거의 다 해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은 대부분 실행으로 옮겼다. 그 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자발적 시도를 통해 재미를 느꼈던 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책 읽는 것을 학원 가서 영어, 수학 배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겼던 아빠의 교육관 덕분에 방 하나를 책으로 쌓아두고 살았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나는 어느덧 읽는 것을 넘어 쓰는 것을 갈망하게 되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자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에 친구들과 번갈아 가며 쓰던 릴레이 소설을 시작으로 조금씩 글쓰기의 재미에 물들어갔다. 숙제도 아니었고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었는데도 이 자발적 쓰기는 엄마 몰래 새벽까지 이어질 정도로 나를 매혹했다. 당시 한창 유행했던 (지금 돌아보면 아주 유치한) 인터넷 소설부터 말도 안 되는 공상과학 소설까지,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심지어 중학생 때는 학교 합창대회에서 사회를 볼 남, 녀 1명씩을 뽑는 데 추천 받아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자리에서 선보인 것은 ‘나 이렇게 잘 말해요’가 아니라 합창대회 때 쓸 대본이었다. 사회를 보는 것도 좋았지만 나에게는 다시 없을 대본 쓰기 경험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특이한 행보를 보고 아빠 친구분의 아내분께서는 “이러다 우리나라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자 나오는 거 아니예요?”라고 말하셨다(물론 기분 좋으라고 하시는 소리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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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어린 나이였던 유치원생 때로 돌아가보자. 당시 우리 가족이 타고 가던 차가 신호에 걸려 정차하고 있던 중, 옆 차선에 차가 들어섰고, 그 차가 정지할 때 차가 앞으로 잠시 쏠렸다가 다시 제자리로 오면서 멈추는 것을 발견한 나는 아빠에게 이 원리에 대해서 물었던 적이 있다. 아빠는 7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관찰을 통해 <관성의 법칙>을 알아냈다는 사실이 사뭇 놀라웠는지, 나를 두고 ‘우리 가문에 드디어 천재가 났다’며 내리 며칠을 칭찬해주셨다. 조금 더 나이가 찼던 고등학생 때는 다른 과목들에 비해 유독 수학 실력이 떨어졌던 나를 두고, 담임선생님께서는 “너처럼 잠재력 있는 애가 수학 한 과목 때문에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매일 공책 2장 분량으로 수학 문제를 풀어서 검사 받는 식으로 수학에 시간을 더 쏟고 실력을 상승시켜보자.”라고 말씀하시며, 잠재력 있다는 칭찬과 함께 모자란 부분을 기꺼이 채워주려고 하셨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 자랑이 아주 늘어졌다. 어릴 때는 이렇게 무한한 칭찬을 받아왔던 내가 어른이 된 후로는,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지금 우리 집 강아지 똘이보다도 못한 상황에 처해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똘이는 올해로 벌써 12살이다. 나이로는 이미 완전한 노견이지만, 우리 집에 가장 마지막으로 입적한 막내로서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이런 똘이는 배변만 제대로 해도, 밥만 잘 먹어도, 산책할 때 조금만 활기차도 칭찬이 주렁주렁 열린다. 그런 똘이를 보면 비교하지 않으려고 해도, 강아지와 비교하는 것이 자존심 상해도, 어쩔 수 없이 나의 칭찬 받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는 어렸을 때 밥만 잘 먹어도, 아프지 않고 잘 뛰어놀기만 해도, 학교만 안 빠지고 잘 나가도 칭찬을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자발적으로 남들보다 한 가지만 더 해도 ‘과한’ 칭찬이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는 칭찬을 듣기는 커녕, 타인에 의해 남들과 비교 당하고(아마 착하고 공부 잘 하는 옆집 아들내미, 윗집 딸내미들이 비교질의 시작일 것이다), 특정 기준에 맞추어 상대를 무시하거나 반대로 무시 당하며 살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으며, 더 나아가서는 저기 저 잘난 사람들처럼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우리는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모두가 사랑 받고 사랑 하는 그런 이상적인 세상은 정말 불가능한 걸까? 물론 여기에서의 ‘사랑’은 연인 간의 사랑 같은 것이 아니라 인류애적인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너무 거창하고 부담스럽다면, 조금 더 너그러운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걸까? 모든 좋은 것, 이상적인 것은 ‘여유’에서부터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우리가 유독 여유 없는 차가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끔 보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까칠하고 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상처 받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슬프다. 하지만 그들의 까칠함을 그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에 우리들 모두가 각자 먼지 만큼의 작은 책임이라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타고나기를 성격이 짜증스럽고 남한테 해 잘 끼치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일상에서 착하고 배려 잘 하고 자기 할 일 잘 하는 사람이었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나도 모르게 몰려온 짜증이나 심경의 변화 같은 것들 때문에 타인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냄으로써 상처를 주고 만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를 하지만 이미 상처 받은 이의 마음을 달래주기는 쉽지 않다. 아마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모를 이유’, ‘나도 모를 이유’ 때문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사람은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부러 나쁘게 말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더라도, 의도치 않게 상처 주는 일은 있기 마련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유독 말 가리지 않고, 상황 가리지 않고 타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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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스스로를 높이 고양시키고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오는 것이라면, 자존심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부터 온다. 자존감은 개인의 내면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외부에서 날 깎아내리려고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존중하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감정인 반면, 자존심은 “너 때문에 자존심 상해!”라고 외치는 말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온전히 나만의 문제가 아닌, 관계적 측면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장 상사로부터 막말을 듣고 자존심 상한다며 화가 날 수도 있고, 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하지만 “서빙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먹을 수 있는거야”라는 말을 들으면 자존심이 높이 상승하고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자존심이 상하면 잘 하고 있던 일도 손에서 놓아버리기 십상이지만, 자존심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는 자신감으로 말미암아 더 많은 것에 도전할 수 있고 또 더 많은 것을 성취하며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은 관계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나에게 화를 내고 이유 없이 짜증을 부리는 것에 나 또한 화가 나고 불만을 가지게 되듯이, 타인도 나로 인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느샌가, 우리도 모르게, 서로의 자존심, 자신감을 빼앗고 갉아먹는 도둑이 되어 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 받을 만 했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타인에게 웃음을 주던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그 많던 우리의 자존심, 자신감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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