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피해 보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입이 무거운 것이 칭찬이 되는 시대가 나는 우습다.

by 푸들

요 며칠 동안 비가 계속 내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비 오는 날을 유독 싫어했다. 아마도 타고난 기질 때문이겠거니, 하고 추측해본다. 단순히 비가 오면 옷이 축축하게 젖는 것이 짜증나고 우산을 든 손이 거추장스러우며 여행이라던지 이동에 제약을 받는 것이 싫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종일 잠이 쏟아진다. 카페인에 취약해서 커피 한 잔만 마셔도 깊은 새벽까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는 사람임에도, 비가 오는 날은 카페인 가득한 커피를 2, 3잔 마셔도 도무지 눈이 반 이상 떠지질 않는다. 외부 미팅이나 출장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렇게 종일 게슴츠레 한 눈을 하고 좀비처럼 귀신처럼 일을 하러 돌아다닌다.


며칠 전에도 요란스럽게 비가 쏟아졌다. 마감만 잘 맞추면 마감 직전까지는 아무리 제 할 일을 뒤로 밀고 밀어도 상관이 없다지만, 이틀 이상 축축 처져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뭔지 모를 울컥함이 명치에서부터 올라와 머리를 강타했다. 안되겠다, 카페로 가자.



평소라면 노트북에 책에 이것저것 한 짐을 짊어지고 카페로 향했을텐데(물론 가져간 것들의 반절도 다 끝내지 못한다.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공부 혹은 일 못하는 애들이 가방만 무겁다는!), 어차피 오늘 같은 날이라면 책 한 권 읽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간단하게 책 한 권과 지갑만 챙겨들고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일반 테이블 좌석은 이미 공부하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어쩔 수 없이 앉은뱅이 테이블이 놓여있는 창가자리에 착석했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오랜만에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고 주문한 커피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굉장히 익숙한 옆모습이 스쳐가는 것 아니겠는가? 아는 선배와 굉장히 닮은 모습이었다. 만약 그 선배가 맞다면 몇 년 만에 마주치는 것이기 때문에 나가서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쓰고 있던 우산을 조금 더 뒤로 젖힌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이내 내가 아는 그 선배가 아니라 닮은 사람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쉬운 마음보다는 ‘섣불리 나가서 아는 척 하지 않길 잘했다’는 무언의 안도감이 들었다. 이렇게 안도하고 있는 사이 진동벨이 울렸고, 나는 커피를 받으러 가면서 선배와의 일화를 하나 떠올렸다.




내가 그녀를 일컫는 단어인 ‘선배’로도 알 수 있듯이 우린 학교에서 만난 사이였다. 선배는 학교 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고 밥도 사주며 챙겨주었고, 본인 하나 챙기며 살기에도 벅찬 환경에서 생판 남인 나까지 살뜰히 챙겨주는 선배에게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해가며 그녀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점차 친해져가고 있을 때쯤, 우연히 같이 밥을 먹게 된 사람들로부터 그녀에 대한 소문을 하나 듣게 되었다. 이야기인즉슨, 그녀가 친하게 지내던 남자 동기와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것이었고, 그 사실을 비밀로 유지하다가 둘의 유독 친밀한 사이를 의심했던 누군가가 그 둘이 비밀 연애를 하고 있는데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추측성 열애설’을 퍼뜨린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이 소문을 퍼뜨렸고, 그 중 누군가는 마치 아이돌들이 비밀연애를 할 때 몰래 커플템을 마련해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처럼 그들의 커플템을 찾아내서 이 또한 소문을 냈다. 공부와 관련된 것 외에는 학교 일에 크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성격상, 당시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은 학과 내 거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 말은 곧, 그들에 관한 소문이 퍼질대로 다 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교수님들까지 아실 정도로. 이렇게 소문이 퍼진 후에야 당사자들은 주변의 추궁에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연애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연애를 비밀로 하고 싶었던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혹시라도 헤어지게 되면 주변의 시선과 뒷말이 걱정되어서, 언젠가는 공개할 예정이지만 당분간은 상대를 알아가면서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서 등 우리가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는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으리라. 모든 것에는 그렇게 되었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이 입도 뻥끗 하지 않은, ‘추측성 이야기’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 그것도 모자라 추궁까지 해서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닌가?


이 사건이 지나갈 때쯤 선배는 나를 따로 불러 밥을 사주며 갑자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나 사실 XX이랑 사귄지 좀 됐어. 너도 XX이 알기도 하고, 일부러 속이려 한건 아니었는데, 늦게 말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나도 말했다.

“언니, 저 사실 어느 정도 알고 있었어요. 전에 사람들이랑 같이 밥 먹을 때 이야기 들었어요. 그런데 사실이 아닐지도 모르고 언니한테 직접 듣기 전까지는 제가 먼저 말 꺼내지 않는게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말을 하지 않은 것 뿐이지 속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당시 선배는 내 말에 정말 고마워했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도 이 말 저 말 다 옮기고 다니는데 본인보다도 한참 어린 나의 입이 생각보다 무겁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난 그때나 지금이나 선배의 ‘고맙다’는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나에게 고마워해주는 선배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솔직히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나의 이기적인 동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기적인 동기는 사실이든 아니든 남의 이야기를 옮기고 다녔다가 역풍을 맞게 되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야기하고 다녔다. 나도 그 때는 진짜인 줄 알았다.’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변명의 수준이 얼마나 졸렬한가? 이런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두 번째 이기적인 동기는 반대의 상황이 되었을 때, 나에 대한 소문이 떠돌아다닐 때, 적어도 평소에 내가 남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준다면 나에 대해 좋든 나쁘든 소문이 돌았을 때 나에 대한 말을 옮기지 않아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있다. 특히 일과 관련된 경우에는 의도치 않게 같이 협업하는 사람에 대한 업무적 이야기(비판)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마다 나도 뒤돌아서면서 저질러놓은 말에 대해 너무 심하지는 않았는지, 굳이 타인 앞에서 했어야 하는 말인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을 하게 된다. 우리 모두 실수를 할 수 있고 의도치 않게 어떤 말을 해서 '아차!' 싶을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남의 말을 함부로 하거나 일부러 여기 저기 옮기지는 않되, 실수를 했거든 수습하려고 노력하거나 적어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배운다, 친구의 험담을 하거나 남의 말을 옮겨 나르지 말라고. 이렇게 우리는 유치원생도 아는 것을 지키는 것이 어렵고 힘들어 ‘입이 무겁다’라는 말이 칭찬이 되는 시대에 살고있다. 다시 한 번 ‘무거운 입’을 가진 것이 칭찬의 덕목이 되는 시대가 나는 참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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