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것 다 하며 사는 것과 막 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뙤약볕이 미친듯이 내리쬐는 한여름의 어느 날. 에어컨을 틀고 있어도 더운 집에서 벗어나, 조금은 나을까 싶어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운동화 끈끼리 딱- 딱- 부딪히는 소리마저도 남에게 피해가 될까 까치발을 들고 조용조용 걸어야 하는, 숨막힐 듯 고요한 도서관의 공기는 오후 2시의 아스팔트 위에 선 것보다 날 더욱 숨막히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에코백을 어깨에 둘러메고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에 도착하니 마치 운동장 5바퀴를 쉬지 않고 뛴 것처럼 땀이 비오듯 흘렀다. 아, 한여름의 더위란… 잠시 숨을 고르고 가장 좋아하는 그린티 라떼를 주문, 하고 싶었지만 이 놈의 다이어트 때문에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카페 메뉴 중 가장 빠르게, 샷이 미리 내려져 있다면 5초 안에 준비되는 아메리카노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와 작업을 하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제일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텐션을 높이고 있는데, 아차 자리를 잘못 잡았다. 한 칸 떨어진 옆자리에 앉은 커플의 천장을 뚫을 듯한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이어폰과 내 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고막에 꽂히는 것이 아닌가? 체감온도가 37도를 찍은데다가 하필 휴가 기간이라 카페는 평일 오후임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마땅히 옮길 만한 다른 자리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음악 볼륨을 높였지만 이 ‘갓 사귄’ 커플들의 하이 텐션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이어폰에서 울려나오는 음악과 카페 bgm 음악과 그들의 대화 소리가 섞여 더이상 집중할 수 없었던 나는 차라리 이어폰을 빼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 듣기를 포기하고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데, 언뜻 언뜻 커플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주변 사람들도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대화 소리가 컸기에 어쩔 수 없이 ‘들려온’ 것을 난 ‘들을 수밖에’ 없었다(구차한 변명처럼 들리긴 하지만…). 당시 커플의 대화 내용은 직장 생활과 미래 비전, 삶을 대하는 자세 같은 비교적 심오한 것들이었다. 남자는 확고한 철학을 가지고 곧은 자세와 올바른 마음으로 직장 생활에 열심히 매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여자친구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잘 나가는 직장 선배에게 물어봐도,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자신만의 신념과 철학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혼란스럽다고 했다. 오, 나는 이 남자분의 말에서 순간적으로 깊은 고민이 느껴졌고, 무엇을 하고 살아가던지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과도 일맥상통 하는 것 같아 그의 다음 말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나의 기대를 무참히 무너뜨리기라도 하듯, 남자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커플남 : “그런데 요즘에는, 한편으로는 철학이고 뭐고 그냥 되는대로 살고싶기도 해. 선배들이 철학 그런 것 없이도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도 베스트 사원 상도 받을 정도로 5년 넘게 열심히 일해왔는데, 그렇다고 지금까지 딱히 무슨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도 아니고. 그리고 생각해보면 중, 고등학교 때는 부모님 바람에 따라서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갔고, 대학교 간 후에는 전공이 적성에 안 맞아서 고생 좀 하긴 했지만 어쨌든 졸업은 해야 했으니 그럭저럭 대학까지 잘 마쳤고, 졸업한 후에는 무난한 회사에 무난하게 취업해서 몇 년 잘 일해왔고. 이렇게 무난하고 평범하게 하라는대로 하고 살아오다보니까 이제는 철학이고 뭐고 그냥 쉽게 생각하고 쉽게 쉽게 막 살고 싶어지더라.”
커플녀 : “그래, 그럴 수 있어. 나도 생각해보면 오빠처럼 살았던 것 같아. 남들처럼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 가고, 대학 졸업하기 전에 취직하려고 취직에 목매달고... 그런데 막상 취직하니 좋았던 건 첫 월급 받을 때까지였고 이후에는 그저 하루 하루 살면서 월급날 기다리거나 아니면 언제쯤 퇴사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오빠 마음 나도 이해되지. 이제는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고싶다는 그런 마음.”
사실 나는 제대로 된 직장 생활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대화를 반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프리랜서로 살면서 마감에 쫓기고 고료 들어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직장인과 비슷해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해 공채 시즌만 총 4번을 지나왔던 나의 과거를 회상해보았을 때, 취업을 위해 애썼던 그 시간들과 이후의 기쁨에 대한 말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현재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잘 살아가고 있다고 해서 ‘막 살고 싶다’, ‘철학 그런 것 없어도 잘 살아지더라’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철학 없이도 이렇게 살 수는 있다.
1.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떠서 늘 가던 그 길로 똑같이 출근해서 오전 일과를 보낸다.
2.11시쯤부터 ‘오늘은 무엇을 점심으로 먹어야 오후에 기운이 날까?’를 계속해서 생각한다.
3.맛있는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한 잔 마셔준 후, 반쯤 감길 듯 말듯 한 눈을 억지로 떠가면서 자판을 두드리고 오후 회의에서 퇴근 시간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4.퇴근 시간이 되기 30분 내지 1시간 전부터 슬슬 가방에 소지품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이것이 가능한 회사의 경우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퇴근을 한다.
5.저녁엔 친구를 만나거나 모임에 참석한다. 그도 아니면 집에 가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스마트폰이나 티비로 유튜브를 연결해서 웃긴 영상을 몇 개 보거나 책을 조금 읽다가 마지못해 내일 출근을 위해 잠을 청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전날과 같은 일과로 하루를 시작하고 이게 일주일 중 최소 5일 반복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만의 견고한 삶의 철학이 있는 사람도 이렇게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산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때가 되면 생업으로서의 일을 시작해야 한다. 특별히 중병에 걸려 몸이 아프거나 집안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라서 일을 해봤자 ‘푼돈’ 버는 정도로 느껴지는,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고정된 일상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삶의 중심을 잡아줄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들과 똑같은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일지라도 그 안에 자신만의 특별함을 불어넣을 줄 안다. 그리고 이것들이 하나, 둘 모여 인생 전체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아침에 정해진 시간에 눈을 떠서 일과를 보내고 점심, 저녁을 먹고 다시 밤이 되면 자고 다음 날 일어나는 것은 누구나 보내는 평범한 일과이다. 하지만 자신만의 견고한 삶에 대한 가치관, 일에 대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는 사람, 본인만의 확고한 삶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일과 속에서도 분명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남들은 오후 회의에 쓰일 자료 정리를 하면서 ‘아 오전 시간 되게 안 가네. 이따 점심에는 뭐 먹지? 오늘은 좀 얼큰한걸 먹고 싶은데… 뭘 먹어야 맛있게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금 더 정확한 자료를 찾아 팀 프로젝트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재빠르게 손을 놀려 서칭을 한다. 그리고 남들이 ‘아 퇴근 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네. 시간아 빨리 가라’라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오늘 하루의 일과를 돌아보고 부족한 점을 찾아 스스로의 일과를 점검하며 하루를 꼼꼼하게 정리한다. 퇴근 후에도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나만의 목표를 위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를 빛나게 해줄 그 날을 위해 조금씩이나마 스스로를 견고하게 만들어나간다.
물론 일과 휴식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적절한 휴식이 있어야 일의 능률이 올라간다는 말도 절대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쉬는 만큼 일도 ‘잘’ 해야 일에서 보람도 찾고 재미도 붙이며 내가 이 일을 왜 계속 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당성도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어떨 때 보면 요즘의 우리는 너무 ‘많이 쉬는 것’에만 몰두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 이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정말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15분, 20분 잘 때, 6, 7시간 잘 때보다 훨씬 개운한 것을 느껴본 적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만큼 휴식의 질이 양보다 중요한 것인데, 우리는 단순히 일이라는 것이 하기 싫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르고 그래서 출근하기 싫으니까 퇴사하고 싶고, 그저 쉬고만 싶고… 그렇게 쉬고, 쉬고 또 쉬면서 ‘많이’ 쉬고만 싶어진 것이 아닐까?
앞서 커플들의 대화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사는 것’과 ‘막 사는 것’은 엄밀히 말해 전혀 다르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범법행위나 도덕적으로 문제 되는 행동이 아니라면 본인의 가치관과 삶의 철학에 따라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사는게 비난 받을 만한 일일까? 결코 아니다. 반면 ‘막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도덕이고 사회적 기준이고 대부분 다 무시하고 하고싶은대로, 생각하는대로 모두 말과 행동으로 옮겨버리겠다는 의미가 강한데, 이렇게 잣대 없이 사는 삶을 정말 자유분방하고 재미있는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취업이며 결혼이며 뭐 하나 쉽지 않은 세상이기 때문에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질 수 있다. 하물며 철학이라고 하는 놈은 중, 고등학교 때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거니와 그 안에 담긴 함의가 너무 무거워서 차마 생각해볼, 공부해볼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태반이다(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로 철학 공부가 힘겹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거창할 필요도 없이, 그저 ‘후회 없는 삶’이라도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 삶의 기준은 있어야 한다. 그저 ‘괜찮아, 다 괜찮아. OO이 하고 싶은거 다 해. 올해는 다 우리거니까!’처럼 앞, 뒤 생각하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그때 그때 휘발성 강한 것들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기를 장려하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아니 지금 이 글을 다 쓰고 저장한 후 가벼운 마음으로 카페를 나서다가 교통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데, 내일을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의미 없고 버겁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은 불행을 가장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고 살다가는 내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더욱 많은 행복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늘, 항상, 골병이 들고 정신적으로 아플 정도로 최선을 다 해 살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도 된다. 하지만 더 많은 행복을, 더 길게 누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해야 할 것들, 생각해야 할 것들을 미루지 않고 직면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확고한 신념과 철학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오늘부터 외면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생각해보자, 나는 앞으로 ‘어떤’ 태도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