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인간의 이유 있는 변명
몇 안 되는 TV 프로그램 중 다시 보기로 종종 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연애의 참견>인데, 나 뿐만 아니라 주변에 사랑과 연애로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는 사연들이 많아서 재미있게 보고 있다. 며칠 전 주말, 어김없이 집에서 뒹굴거리며 노트북으로 연애의 참견을 다시 보기로 보고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가스 라이팅(gaslighting) 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으로 사연을 보낸 20대 초반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는데, 도중에 갑자기 <회피형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연애 이야기에 ‘회피형 인간’이 웬말이냐 싶었지만, 나름 이유 있는 등장이었다. 바로 남자친구가 사연을 보낸 고민녀에게 연애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에 심하게 몰두한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회피형 인간’으로 몰면서 다그쳤던 것이다.
문제가 된, 자막으로 나온 ‘회피형 인간’에 대한 특징은 이러했다.
1.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책임이나 속박을 싫어한다.
2. 상처 받는 일에 민감하다.
3.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꺼린다.
4. 속마음을 잘 보이지 않는다.
5.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불편하다.
일시 정지를 눌러 천천히 회피형 인간의 특징을 읽어나가다 보니, ‘어라? 이거 딱 내 얘기인데! 누구냐, 누가 민간인 사찰하고 있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닭살이 오소소 올라올 정도로 5가지 특징 모두 나를 설명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치 회피형 인간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바꾸면 나라는 사람이 탄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평온한 주말 오후에 봤던 에피소드는 하루 종일 머리와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남겼다. 밥을 먹다가도 문득, 씻다가도 문득, 운동하다가도 문득 생각 났으니까. 그리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회피형 인간이 확실하다. 그런데… 회피형 인간이 뭐가 어때서?”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외향적인 사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물론 회피형 인간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즐기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더욱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피해를 주는 게 아닌데 나쁠 것이 뭐가 있을까? 또한 누군가를 꼭 책임지고 속박 당할 관계 속에 속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인 것은 아니다. 책임질 일을 만들고 속박 당할 관계(연애, 결혼 등)에 스스로 속함으로써 책임을 지고 속박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런 관계를 만들지 않고 혼자인 상태를 즐긴다고 해서 비난 혹은 비판 받을 것은 아니다.
또 상처 받는 일에 민감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일에 있어 과도한 쿨병에라도 걸린 것 마냥 “다 괜찮아~ 오케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말이다. 모든 사람은 다 상처 받는 것이 두렵고 무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표면적으로나마 괜찮은 ‘척’을 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좀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를 어려워하거나 꺼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새로운 일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모두들 마음 속에 걸리는 것 한, 두 가지 정도는 있다. 여행을 떠나는 것 하나만 해도 직장인이라면 직장 일이 마음에 걸릴 것이고, 주부라면 남편과 아이들이 눈에 밟힐 것이고, 상대적으로 돈이 없는 20대 초중반에는 경제적인 것이 가장 문제될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새로운 일에, 모험적인 일에 뛰어드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드문 경우인데도 그것을 기준점 삼아 그렇지 못한 현실적인 사람들을 ‘회피형 인간’이라 칭하는 것은 보통 사람인 나로서도 조금은, 아니 솔직히 많이 억울하다.
그리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는, 한편으로는 입이 무겁다는 말도 듣는다. 내 얘기를 쉽사리 꺼내지 않기도 하지만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도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전달하지 않는다. 내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나의 고민이나 걱정이 괜히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신경 쓰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가 원하지 않는 참견질이나 꼰대짓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요즘 들어 더 말을 아끼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속마음을 감추는 음흉한 사람이면서 회피형 인간이라고 불린다니,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기대는 것 또한 속마음을 내비추는 것에서와 마찬가지 입장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쉽게 타인의 도움을 빌려 해결하려는 태도는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지, 누군가와 관계 맺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관계 맺기를 거부하고 회피하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또 기본적으로 기브앤테이크 아니던가? 상대로부터 뭔가를 받으면 양심에 털 난 사람 아니고서야 적절한 때, 적절한 방법으로 돌려줘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아주 잘 안다. 물질적인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도움이든 언젠가는 돌려줘야 하는 것인데, 굳이 지금 마음 불편해가면서 혹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것이 아닐 뿐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회피형 인간이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저 5가지 특징 중 한, 두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라고 감히 이야기 해본다. 회피형 인간에 대한 정의는, 어쩌면 너무나도 독립적인 사람들이 가끔 보여주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면,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으려는 태도가 잘못 비춰져서 만들어진 ‘오(誤)정의’가 아닐까? 사실은 그 마음 속에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심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혼자 있는게 편하고 상처 받는 일에 민감하며 속마음을 잘 내비추지 않음과 동시에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불편한 사람’이 회피형 인간에 대한 정의라면, 나는 오늘부터 내가 회피형 인간임을 긍정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