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있고 확신 있는 사랑이 필요해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드는 어느 봄날의 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한바탕 떨어댄 수다 덕분에 유독 피곤했다. 물론 마음 맞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내게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다. 특히나 프리랜서로 혼자 일하는 시간이 많은 나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와는 별개로, <사람을 만나는 일> 그 자체가 굉장한 피로함을 주는 일이자 에너지 소모가 심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모임 장소와 식사 메뉴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분위기에 맞춰 끊임없이 활기찬 리액션을 보이는 것, 남의 얘기는 아주 귀기울여서 잘 들어주면서도 상대방이 서운하지 않게 적당히 내 얘기도 하며 모든 면에서 완급조절을 해야 한다. 평소 점심 메뉴 뿐만 아니라 하루를 마무리 하는 것으로서 나에게 정말 중요한 저녁 메뉴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결정장애를 겪는 나이기에, 항상 무언가(만날 날짜나 장소, 식당 등)를 정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사람 만나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그렇게 복잡다단한 일들이 마구 펼쳐졌던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곧바로 샤워기에서 대차게 떨어지는 뜨거운 물을 맞아가며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예전에 수업시간에 교수님께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나는 전공이었던 법학 외에 부전공으로 국어국문학 전공 강의를 함께 수강하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수업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교수님께서 했던 이야기만큼은 꽤나 명료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교수님께서는 “요즘 애들은 ‘~ 하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버릇처럼 쓰더라. ‘같아요’라는 말은 보통 확신이 없거나 잘 모르는 경우에 쓰는데, 요즘 애들은 자기 생각을 말할 때도 ‘~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더라고. 배가 고플 때도 ‘배 고픈 것 같아요’라고 하고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먹었다, 아직 안 먹었다라고 이야기하면 되는 것을 ‘곧 먹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나는 도무지 이게 이해가 안 되던데, 내가 너무 나이가 들어서 요즘 애들 말 습관이나 버릇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건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을 당시에는 교수님을 포함해 강의실 안에 있던 모두가 웃고 넘어갔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정말 교수님 말씀이 하나도 틀린 바가 없지 않은가?
오늘만 해도 만약 나와 친구의 만남 자리에 교수님께서 계셨다면, 주체성 없는 말투에 따끔하게 혼을 내셨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근황토크를 하던 중, 친구는 얼마 전에 소개 받은 남자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는 언니가 소개해준 남자인데 몇 번 만나보니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지금은 썸 타는 단계이지만 조금 있으면 사귀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 몇 번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고 주변 소개로 만난 사이이니 서로 잘 알 수 없었겠지. 그래서 ‘좋은 사람인 것 같다’고 어림짐작 혹은 추측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어 난 친구에게 “너는 그 사람 어때? 외모나 학력 아님 뭐 조건 같은걸 보는 것도 좋지만 네가 그 사람이 좋은게 가장 먼저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음… 나도 그 사람이 좋은 것 같아. 데이트 하면 재미있고 잘 챙겨주고 다정하고. 여러모로 좋은 사람인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그때 당시에는 식당 분위기가 시끌벅적 하기도 했고 친구와 단 둘이 만난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를 앞에 두고 깊은 생각을 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다보니 문득 아까의 상황과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게 아닌가?
아, 혹시나 오해할 사람들을 위해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친구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면서 그녀를 돌려깔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말하고 싶은 것은 배고픔, 졸림, 성욕과 같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자, 그 무엇보다도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느 때보다도 분명한 때에 ‘같아요’라는 말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뭉뚱그리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물론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이 되는 세상이니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리라. 하지만 특히 <사랑>이라는, 험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확실한 감정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불확실한 단어를 내뱉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모순으로 느껴진다. 하물며 ‘첫 눈에 반했다’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누군가에게 한순간에 확실하게 빠져버리는 때도 있는데, 몇 번을 만나 밥도 먹고 손도 잡으며 썸을 타는 사이에서 자신감이 결여된 듯한 ‘같아요’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분명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정말로 좋아하지 않아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에 밴 버릇처럼 나오는 말투라서 별 생각 없이 말했던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이유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럼에도 이런 유체이탈식 화법은 분명 문제가 있고, 그렇기에 <고치면 좋을 것들> 목록에 당장 써넣어야 할 것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나 또한 <요즘 사람>이고 <요즘 젊은 세대>에 속할 것이다. 그렇기에 누가 보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나이의 여자애가 남의 화법을 두고 모순이 가득하다, 자신감이 없는 표현이라며 지적질 해대는 것이 젊은 꼰대를 보는 듯 하다며 손가락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사랑을 안고 결혼을 해도 1년은 커녕 한 달도 안 되어 이혼하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는 기사를 보면, 확고한 표현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더욱 역설하고 싶어진다. 말에는 힘이 있고 힘이 실린 말에는 화자의 깊은 영혼이 배어든다고 늘 생각하고 있다. “말이 씨가 될라!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마”라고 외쳐대는, 말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한국 사람들이여, 그리고 사랑을 갈구하는 자들이여, 재수 없는 소리 말고 좋은 소리에도 확신을 심어 이야기 해보는 것은 어떨까? 자신있게 “나 그 사람 좋아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