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소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들 Jan 20. 2020

가난한 부모도 존경할 수 있나요?

나의 가난한 부모에게서 받은 것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야?”


“우리 엄마, 아빠!”


매번 누군가 던진 질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또다시 건네 받아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니? 우리 엄마, 아빠!




남자는 대단한 직업을 가지지 못했다. 잘 되어가던 아버지의 사업 덕에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풍족했던 만큼의 반작용 때문인지 사업이 망한 후에는 보통의 삶도 살기 어려울 정도로 어렵게 자랐다. 20대 때는 적당한 대학을 졸업하고 적당한 회사에 취직해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평범한 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사이 좋게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그렇게 겨우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듯 했으나, 이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그리고 집 전세금에서 일부를 빼 작은 가게를 열었다. 그 작은 가게에서 20년 가까이 고군분투 했지만, 마지막에 손에 쥔 것은 애지중지 하던 차를 중고로 팔아 남긴 몇 백 만원이 고작이었다.


여자는 농사꾼의 딸이었다. 6남매 중 차녀로, 학교 끝나면 동생들을 돌보고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 속을 헤매야만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고등학교까지 마친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상경했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성실히 회사를 다녔다. 그렇게 서울 생활에 적응할 무렵, 한 남자를 만났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정말 현실적이었다. 타지에서의 생활에 겨우 적응은 했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았고 외로웠다. 회사 다니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서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가난했지만 나름대로 성실했던 남자 덕에 앞으로 차차 생활이 나아지겠지, 생각했지만 생활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작은 가게에 온종일 붙어 있어도 넉넉한 돈을 만져보긴 어려웠다. 이 작은 가게에선 더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여자는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어보고자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고깃집이며 횟집이며 여러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그렇게 식당에 다니기를 15년, 그녀 앞에 놓인 것은 남편 병원비와 생활비로 끌어다 쓴 빚 뿐이었다.




여기까지가 평범한 한 남자와 여자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전기(傳記)다. 그들이 비행기를 타본 것은 30년 전 신혼여행으로 제주도 다녀왔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남자는 자식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원하는 데까지 교육 시켜주고 싶은 것이 소원이자 목표였다. 그러나 자식들은 곧 서른을 바라보고 있으며, 제각기 밥벌이를 하고 있다. 남자의 목표는 이전에도 이뤄진 적 없으며, 이제는 정말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여자는 식당에 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 번도 주말과 공휴일에 쉬어본 기억이, 휴가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의 소원은 부모님과 여행 가는 것, 함께 찍은 사진을 남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자가 세상을 떠도는 핑계로서가 아닌, 말 그대로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부모님 곁을 오래 떠나 있는 동안 부모님은 돌아오지 못할 기나긴 외출을 떠나셨다. 그래서 여자의 소원 또한 이루어지지 못한 공허함으로만 남게 되었다.


목련의 꽃말은 '고귀함'이다.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나의 부모는 살면서 ‘가난’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 가난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유전처럼 자식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렇다고 그들이 노력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아빠는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작은 가게를 지켜내겠다며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엄마는 점심과 저녁 시간 각 30분을 제외하고 하루에 11시간씩 줄곧 서서 일하는 생활을  15년 동안 해왔다. 그 힘들다는, 몸 축낸다는 식당일을 말이다. 이런 그들에게 내가 어찌 남의 부모처럼 충분한 용돈과 사교육과 해외여행, 어학연수를 보내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물려줄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남들 놀고 잘 시간에 졸린 눈 비벼가며 새벽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서운함을 토로할 수 있겠는가?


나의 부모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같은 시간을 일해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고, 자식들에게 무엇이든 충분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나의 부모는 하루에 12시간씩 서서 일하며 10만 원도 채 벌지 못했지만, 누군가의 부모는 사무실에 앉아 환자를 보거나 금융 상담을 하면서 쾌적한 환경에서 하루 8시간 근무 시간을 딱딱 지켜가며 몇 십, 몇 백, 아니 몇 억 이상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여유 있는 생활을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줄 것이며, 돈 이외에도 많은 유산들을 대대로 전달해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식들로부터 존경 받을 것이며 그것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하지만 물려 받을 것이 없는 가난한 나 또한 물려줄 것이 단 하나도 없는 나의 부모를 존경한다.




한때 부모에 대한 존경은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식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해줄 수 없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아, 금전적으로 여유가 되지 않는다면 자식을 절대 낳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살면서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능력’이 아니라 ‘돈’ 때문에 포기해야만 하는 선택지를 자식의 손에 쥐어주고 싶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수많은 뼈 아픈 포기들을 대물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 하지만 확고한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나의 부모를 존경한다. 그들은 가난했고 ‘풍족’이라는 단어를  내 앞에 펼쳐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력’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실’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식들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이는 어떠한 말과 글, 물질적인 것들보다도 귀한 자산이다. 그 뼈 아픈 노력의 몸짓을 직접 보고 자란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삶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자세를 잊을 수 없을 것이기에.


백 억 자산도, 강남 한복판 건물도, 브랜드 아파트도 물려주지 못할 부모님이지만, 노력으로, 진정성 있는 자세로 하루 하루 살아온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나의 부모님을, 존경한다.


가난하지만 존경 받을 만한 세상의 모든 부모님께 바치는 사랑.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매거진의 이전글 괜찮아, 방관도 사랑이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