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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과 이혜서 Jan 13. 2020

괜찮아, 방관도 사랑이야.

적극적인 표현만이 사랑인 줄 알았다.

“엄마는 왜 나 데리러 학교에 안 와? 다른 애들은 정문에서 엄마들이 기다렸다가 집에 같이 간단 말이야! 나만 맨날 혼자 집에 오고…”


“너는 알아서 다 잘 하잖아~ 그러니까 엄마가 학교에 갈 필요가 없지. 엄마가 학교에 데리러 가는 건 혼자 집에 못 가는 애들만 그러는 거야.”


어릴 때 난 참 되바라졌었다. ‘되바라지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의 경우엔 ‘어린 나이에 어수룩한 데가 없고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하다’는 의미의 되바라짐이었다. 어찌나 영악한지, 애초에 지옥의 ‘빠른 년생’이기도 했지만, 당시엔 7살 치고 키도 크고 또랑또랑 해서 엄마는 마음 놓고 7살에 학교를 보냈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들 다 8살에 가는 학교를 7살에 보내놓고, 맞벌이 하는 부모 중 그 누구도 학교에 찾아와 담임 선생님께 ‘우리 애 좀 잘 부탁드려요’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다니. 그 시절의 7살은 도무지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하교길에 초등학교 1학년은 4교시 끝나면 데리러 온 엄마 손을 잡고 룰루랄라 집에 가는 게 내 눈엔 정상인데, 나는 늘 혼자 실내화 가방을 발로 차면서 300원을 내고 버스를 탄 후 집으로 가곤 했다.


2년간 꼬박 타고 다니던 603번 버스와 100원 짜리 동전 3개를 잊지 못한다. (사진 출처 : <응답하라 1988>)


그래서 하루는 뿔이 나서, 하교 후 부모님이 데리러 오지 않는 아이들 몇 명을 모아 학교 앞 큰 사거리 신호등 건너편까지 매일 데려다주시는 담당 선생님 몰래 다른 곳으로 튀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선생님께 호되게 혼이 난 후, 알림장에 전날 사건을 상세히 적은 선생님의 글 아래에 부모님 사인을 받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날 나는 저녁 내내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그냥 잠이 들어버렸고, 내가 잠든 사이에 준비물을 다 챙겼는지 체크하려던 엄마가 알림장을 보게 되면서 들키고 말았다. 아, 7년 인생 최초의 탈선이 ‘뽀록나는’ 순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코 앞에 알림장을 들이대는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잠시 잠깐 움찔 했지만, 오히려 태세 전환을 하며 “이게 다 엄마 아빠 때문이잖아!”라고 외쳤다. 단 한 번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고 또 단 한 번도 학교 끝나고 날 데리러 오지 않은 엄마, 아빠가 미워서 이런 일을 했다며 당당하게 탈선을 고백한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부모 입장에서는 조그마한 게 잘못 했다는 말 한 마디 안 하고 당당하게 저렇게 말하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어이가 가출한 엄마, 아빠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알림장에 사인을 해줬고 엄마는 “그래도 다시는 그러면 안 돼. 선생님이 너 없어진 줄 알고 놀라셨잖아.”라며 조곤조곤하게 타이르셨다.


물론 살면서 이런 일을 다시 저지르진 않았지만, 시작이 이때부터였음은 확실하다. 중학교 때 왕따를 심하게 당해 자퇴를 생각했을 때도, 고등학교 때 학원이며 과외, 야자까지 하나 하나 다 챙기는 다른 엄마들 만큼 해주길 바란 건 아니었어도 적어도 12시에 야자 끝내고 지쳐서 돌아간 집에서 엄마가 자지 않고 날 반겨주길 바랐을 때도, 대학 때 학교 다니며 알바를 2개나 하느라 새벽에 들어가서 쪽잠 자고 새벽에 다시 나올 때도 엄마, 아빠가 뭐라고 말 좀 해주길, 내가 ‘혼자 알아서 다 잘 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해주지 않기를 바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 종종 주변 사람들과 부모님 이야기를 할 때면, “나는 혼자 다 알아서 하고 컸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은 틀렸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말 사랑했기 때문에 조금 멀찍이 서서 방관했던 것이다. 아이가 걸음마를 할 때, 쉽게 넘어질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많이 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다시 홀로 일어서서 걷고 또 걸으며, 시간이 지나면 넘어질 것’처럼’ 보일 뿐 쉽게 넘어지지는 않게 된다. 부모는 넘어지려 할 때마다, 넘어질 때마다 가서 부축하고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다. 아이가 도움을 청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혼자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박수 쳐주며 지켜볼 뿐이다.



난 부모님이 그동안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서, 바빠서 등의 이유로 우리 남매를 낳아 놓고 그저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고 쳐다보고만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오해와는 달리,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걸음마 하는 아기의 옆에서 다소간 방관하는 듯한 부모의 모습처럼 평생을 묵묵히 지켜보며 키우신 것이었다. 힘들어 한다고 해서 직접 나서서 해결해주려고 하기보다는, 자식이 지쳐 도움을 요청할 때 비로소 같이 가슴 아파하며 함께 해결해 나가려고 하고, 울고불고 할 때도 함께 감정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다음을 도모하며 다음 단계에서 더 크게 도약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방관하는 듯한 태도로써 해오신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너무 힘들 때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래도 어른이라고, 가끔 어디에 기대어 울어야 할 지 모르겠을 때, 그 ‘어디’가 당연히 부모님이 되지 않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물론 친구나 연인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기대지는 않는다). 유독 자립심을 소중히 여기는 나의 생각과 태도는 아마 이런 부모님의 영향을 크게 받은 덕택이리라.


며칠 전, 엄마 생신 때문에 본가에 갔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동생과 얼마 전 짧게 통화를 했는데, 올해 2번 있었던 승진 시험에서 모두 떨어져 의기소침해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부모님과 나누었다. 그래도 동생이고 핏줄이기에, 뭐든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내게 아빠는 무심히 말씀하셨다.


그냥 뭘 하든 지켜봐 줘. 그래야 할 때가 있는 거야.


적극적으로 나의 사랑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푹푹 많이 퍼담아 주는 것만이 사랑인 줄 알았다. 힘들어 할 때 옆에서 함께 죽을 듯 아파하고 끊임없이 위로를 건네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때론 아무 말 하지 않고 조금 떨어져 방관하는 것도 나중에 돌아보니, 사랑이더라. 그것도 ‘참’사랑. 나는 부모님과 달라 누군가의 아픔과 힘겨움에 몸과 마음이 쉽게 동한다. 그래서 마냥 지켜보는 게 나의 사랑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 방식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제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타인들 또한 조금씩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또한 부모님의 사랑 방식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니, 부모님을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에서는 쉽게 하지 못할 말이지만, 글자를 빌려 말해본다. 당신들의 참사랑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고귀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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