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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Jan 08. 2020

그녀의 된장찌개는 그리움이다.

눈물은 항상 한 발자국 뒤에서 쫓아온다.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들과 그녀들의 시간에 바친다.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눈물은 생각보다 늦게 찾아온다.

그렇기에 내가 할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것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도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외할머니는 암이었다. 폐암. 평생 손에 담배 한 개비 쥐어본 적 없는 할머니였기에 폐암 선고는 충격적이었지만 납득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루에 한 갑 이상 담배를 피워대던 할아버지 때문이었겠지, 아마. 그렇게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할머니는 죽더라도 집에서 죽겠다며 바득바득 우겨댔고, 6남매는 할머니를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모셨다. 이 모든 일은 외할아버지가 폐암과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벌어졌다.


할아버지와 한평생을 사셨던 집에 이제는 홀로 남겨진 할머니를 6남매 중 다섯은 번갈아 찾아 뵈며 살폈다. 할머니댁은 전라도 광주였다. 6남매 중 다섯은 여전히 광주에 살았지만 엄마는 일찍이 서울에 상경해 직장생활을 했고, 서울에서 만난 아빠와 결혼했다. 엄마는 고향인 광주에서 산 시간보다 더 오랜 시간을 서울에서 살아왔고, 여전히 살고 있기에 다른 형제들 만큼 할머니를 자주 뵐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저녁마다 수화기를 들었다 놓길 반복했다. 대부분 수화기를 그냥 내려놓는 날이 많았고, 굳은 결심을 한 것만 같은 표정을 지은 날에만 전화기 숫자 버튼을 꾹꾹 천천히 눌렀다. 아직도 엄마에게 이 날들의 진실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지만, 난 왠지 이유를 알 것 같다. 할머니와 통화를 할 때마다, 언제나 곁에 있을 것만 같던 사람이 언젠가 훌쩍 떠나가서 더 이상 수화기 건너편에서 대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의 번민의 나날들이 지속되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급히 광주로 내려가게 되었다. 할머니의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하지 않으면 그 고통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헛것을 보는 섬망 증세가 심하기 때문에 살아계실 때 한 번씩 와서 뵈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기억 난다. 비지땀이 흘러내리던 8월의 뜨거운 여름날, 섬망으로 엄마에게 ‘언니’라고 불렀던 할머니의 모습을. 그리고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던 할머니가 엄마가 사간 과일 젤리 한 통은 꼬박 비워내시고 웃으시던 모습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을. 할머니 병실에서 반나절을 머물렀던 우리는 엄마의 직장 문제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했고, 떠나기 직전에야 엄마를 온전히 알아볼 수 있게 된 할머니는 엄마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울음을 삼키는 엄마를 바라보며 내 손을 꼬옥 잡고는 늘상 할머니가 우리를 보면 했던 그 말, “엄마 말 잘 듣고 속 썩이지 말고”라는 말을 건넸다. 아마 먼 길 여행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에 밟히는 다 큰 딸에 대한 걱정이었겠지. 때마침 간호사가 들어와 환자가 쉬셔야 할 시간이라고, 가시려면 지금 빨리 가시는 게 낫다고 말했다. 엄마는 이제야 겨우 자신을 제대로 알아본 할머니를 두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이내 복도 한가운데 주저앉아 한참을 숨죽여 오열했다, 행여나 할머니가 내 딸의 울음소리를 듣고 슬퍼하실까봐.


이렇게 부모가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고 또 생사가 오가며 슬픔이 교차하는 시공간 속에서도 살아가야 할 자들의 인생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법이다. 당시 나는 개강을 앞둔 대학생이었기에 할머니가 계셨던 병원 앞 피씨방에 가서 수강신청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병실로 들어가는 길에 아이스 커피 한 잔을 마셨다. 그렇게 죽음을 목전에 둔 한 사람 옆에서도 우린 그저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슬퍼하는 와중에도 해야만 하는 일들을 처리했고, 배가 고프면 양껏 먹기도 했다. 마치 이 아픔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머나먼 곳의 다른 사람 이야기인 것처럼.




병문안을 다녀온 후 2개월 만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급하게 내려간 광주의 한 장례식장에서 우린 뜨겁게 데워진 쪽방에서 잘 자고,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반갑게 안부를 주고받았으며 조문 온 지인과 먼 친척들을 경박하지 않지만 적당히 미소 띈 얼굴로 맞이했다. 준비된 육개장과 떡 그리고 과일이 질릴 때쯤, 검정 상복을 입은 채 밖에 나가 빵도 사먹고 커피도 사먹으면서 3일을 보냈다. 이 모든 것들을 행함에 있어 아무렇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슬프고 물론 가슴 아팠지만 그럼에도 우린 남겨진 사람들이었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배는 늘 고프고 눈꺼풀은 늘 감긴다.


슬픔에도 강약이 있다.


할머니와 엄마를 생각하면 어떤 날은 미치도록 사무치게 눈물이 나는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담담하게 그저 당연한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듯이 무던하게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 할머니의 죽음보다 더 슬픈 죽음-예컨대 나의 부모의 죽음-이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과 이에 수반되는 슬픔은 그 자체로 약해지지도, 희미해지지도, 다른 죽음과 비교해 덜 슬프게 느껴지지도 않을 것 같다. 할머니가 살아생전 만들어주신 된장을, 아주 오래 되어 새까맣게 숙성 되어버린 그 된장을 냉장고 가장 안쪽에 넣어두고, 할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된장찌개를 한 뚝배기씩 끓여먹으며 시간이 지나도 절대 가벼워지지 않는 슬픔을 아주 조금이나마 삭히는 엄마의 마음처럼 말이다.


할머니가 존재했던 세계와 이제는 계시지 않는 이 세계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다르다. 하지만 언젠가 먼 훗날 내가 멀리 외출하러 길을 떠나는 날, 그 길 위에서 나보다 먼저 외출을 떠났던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기를. 한 번도 글로써 이토록 선명하게 할머니에 대해 추억해본 적 없었기에... 할머니와의 마지막 추억을 비로소 글로 남긴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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