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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Dec 31. 2019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남긴 기적의 소생(蘇生)

익명의 당신이 나에게 불어넣은 생명

2019년 7월 14일. 잊을 수 없는 날의 뒤늦은 기록이다.


결정은 충동적이었다. 가고 싶었던 페스티벌의 티켓 가격이 비쌌다. 그래서 취미로 캔버스에 그려뒀던 그림을 팔아서 티켓을 구매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팔아야 하지? 무엇보다도, 어디에서 팔아야 하지? 누군가 한 명 정도는 사줄 거라 생각했다. 근거는 없었다. 그저 밑도 끝도 없이 ‘누군가 한 명이라도’라는 생각만 했다. 근자감의 향연이었다. 가격도 설정하지 않았다. ‘주시는 대로 받아야죠, 그러믄요~’였다.


아직 7월이라고는 하지만 무더위 덕에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나서 파운데이션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럼에도 무리하게 7월의 딱 중간 지점으로 날짜를 잡았다. 너무 더워서 아무도 오지 않을까봐 장소를 따로 빌리려 했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냥 근처 ‘연세대학교 대운동장 교단 아래’로 정했다. 준비는 다 됐다. 살 사람만 오면 된다!


당시 페북에 올렸던 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썼는데 진담 100%로 받아들이신 분들이 대부분이었다는...


한낮의 땡볕을 피해보고자 4시에서 6시까지 딱 2시간만 <노상 플리마켓>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팔기로 했다. 공지는 내가 몸 담고 있는 스튜디오 크로아상 공식 sns에 올렸고,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응원의 댓글을 달았다. 왠지 모르게 든든한 빽이 생긴 것만 같은 기분에 어깨가 절로 솟아났다. 하지만 전날까지의 패기와는 다르게 당일이 되니 눈 앞이 캄캄한 것이, 괜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는 법이니 이것저것 챙겨서 집을 나섰다.




3시 30분경, 연세대 대운동장 교단에 도착해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빈 박스 몇 개를 조립해서 놓아두었다. 그리고 몇 개의 캔버스들을 그 앞에 세워두었다. 이것저것 세팅하고 준비를 하다보니 금방 4시가 되었고, 겸손한 마음으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배꼽 아래에 가져다 두고 혹시 찾아올 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4시 10분, 저 멀리서 젊은 남녀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듯 하다. ‘혹시 나를 찾는 건가?’ 하는 마음에 가까이 다가오면 알은 체를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옆 건물 입구로 유유히 들어갔다. 4시 25분, 4시 55분, 5시 10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한여름의 뙤약볕에도 굴하지 않고 러닝을 하는 분들만이 펼쳐놓은 그림들을 슬슬 쳐다보며 달릴 뿐이었다. 6시가 되기 20분 전, 슬슬 마무리 할 준비를 하자는 친구의 말에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다. “저… 그림 보려고 왔는데요.”


“와! 이게 뭐지? 이게 정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유튜브에서 BTS의 다큐멘터리를 오리지널 시리즈로 내보냈을 때, 멤버 중 한 명인 '지민'이 인터뷰 하는 장면에서 나왔던 대사를 내가 그대로 따라할 날이 올 줄이야! 정말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었다. 그저 몇 달 전부터 미치도록 가고 싶었던 페스티벌의 티켓값에 보태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누가 보면 장난 같은 일에 정말로 동참해준 사람이 있다니. 설상가상 그는 그림 하나 하나마다 담긴 의미를 말해주길 원했고, 약 20분간 정말 성심성의껏 설명해주고 질문을 받고 대답을 했다. 길고도 짧게 느껴졌던 시간이 지나고 그는 2개의 작품 중에서 고민하다가 하나를 골라 구입을 했고, 그림 값은 생각하는 가치 혹은 주고 싶은 금액 만큼만 달라는 나의 말에 37,000원을 남기고 그는 떠났다.


솔직히 37,000원이 많은 돈은 아니다. 캔버스 가격과 물감 가격, 나의 노동력만 생각해도 37,000원은 오히려 손해다. 하지만 난 이 날의 의도된 우연 속에서 (굳이! 금액으로 환산하자면) 3억 7천만 원도 넘는 가치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남들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칭하며 글 몇 자 적고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없는 그림을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그리면서 살았다. 좋아하는 것을 하면 잘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잘 할 줄 아는 일을 하면 잘 먹고 잘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애초에 좋아하는 것을 ‘잘’ 하게 되기까지가 정말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는 하고 있던 일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고, 이 시기가 바로 그림을 팔고자 마음 먹은 시기였다.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는 동안은 정성을 다 했지만) 애초에 팔기 위해 그린 그림이 아니었고, 돈이 정 없으면 페스티벌에 안 가면 되는 거니까 안 팔려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전할 수 있었다. 밑질 게 없으니까 용기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용기가 발현 되어 나타난 나의 행동이 그날 보잘 것 없는 노상 플리마켓을 찾아준 한 팬의 용기와 시너지를 내어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는 나를 만들어냈다.


첫 노상 플리마켓 기념으로 만들었던 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 했다. 이후에 바빠서 두 번째 플리마켓은 아직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참 인복이 없다고 생각했다. 관계를 떠나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인복의 범위에 넣어둔다면, 가난한 부모를 만난 것도, 중학교 때 심하게 왕따를 당했던 것도, 대학교 때 조모임만 하면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대학원 때 머리채 잡고 싸울 만큼 안 맞는 룸메이트를 만난 것도 다 내가 인복이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복의 범위를 '내가 안면 튼 사람'이라고 한정한 것이 큰 오류였다. 비록 이전에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한 적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한 사람을 위해 더운 날, 버스를 타고 멀리에서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었다-물론 평소에 인복이 넘치는 게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어질 때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맹점이 있지만-.


이 사건 후에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았다. 특히 글을 쓰면서 더욱. 기고하고 있는 글을 읽은 익명의 댓글러는 “글이 참 철학적이다. 뭔가 진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을 뼈 속 깊이 이야기 해주는 것 같다.”는 말 한 마디로 내 손이 더이상 키보드 위에서 춤추지 않을 뻔했던 것을 막았다(물론 익명의 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겠지만). 촌철살인의 글을 자주 쓰지만, 글쓰는 이혜서가 아니라 가끔 현실의 쭈글쭈글한 내가 그대로 담긴 글을 쓸 때, “제 마음에 문장 한줄 한줄이 파문으로 와닿아요.”라며 깊은 공감 어린 말로써 오히려 짧은 댓글로도 나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분도 있었다.


이렇게 위안을 얻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었구나. 나만 잘났고, 내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타인은 내게 무엇도 해줄 수 없고, 나 또한 타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창한 걸 주고 받지 않아도, 우린 이렇게 말 한 마디로 서로를 보듬고 서로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너무 늦게 알아버렸지만, 이게 삶의 진실이고 이게 우리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온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혹시 앞으로 내가 지금보다 훨씬 잘 나가는 사람이 된다 해도 타인에게 크나큰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못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았던 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들은, 아빠가 9살 때 사준, 침대 머리맡에 평생을 두고 있는 곰인형처럼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꼬옥 껴안으며 마음의 어수선함이 찾아올 때마다 가라앉히는 약으로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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