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라서, 못나서 속는게 아니다. 경험의 너비가 다를 뿐.
“여보세요, XXX씨 맞으시죠? 서울중앙지방검찰청입니다. 현재 XXX씨 앞으로 사기 사건 관련해서 고소장이 접수되어 있어요. 그래서 지금 내사 중입니다.”
평화로운 어느 늦가을 금요일 아침, 밤새 눅눅해진 공기를 몰아내고자 창문을 활짝 열고 햇살을 받으며 모닝 커피를 한 잔 하고 있던 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전화를 받고 단어 그대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심장의 이 미칠 듯한 BPM이 모닝 커피 속 가득히 들어있는 카페인 때문인지 이 빌어먹을 놈의 전화 때문인지 고민하며 멍을 때리고 있는 찰나, 전화기 건너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기 사건으로 수사 중에 있기 때문에 XXX씨의 계좌 또한 조사 대상이 될 예정입니다.”
아니, 잠깐. 내 통장을 조사한다고? 10만 원도 채 들어있지 않은 내 통장을 뭣하러?
생각해보니 이거 영 찜찜하다. 이상하다.
한 번 수상한 생각이 드니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윽고 나는 겁 먹은 강아지가 더 크게 짖어대는 꼴처럼 나름 당당하게 보이고자 큰소리를 쳤다.
“아, 네~ 제 통장 다 뒤져도 원하시는 건 없어요. 이거 사기죠? 보이스피싱인가?”
상대편에서는 나의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음 대사를 이어갔다.
“사기인지 보이스피싱인지는 서에 나와서 판단하시면 될 것 같네요.”
서에 나오라고? 아, 갑자기 무서워졌다. 괜히 큰소리 뻥뻥 쳤나?
그럼에도, 설사 이 남자의 말이 사실이더라도, 어느 정도 의연할 필요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살면서 남들 안 보는 새벽에 무단횡단 몇 번 해본 적은 있기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칭하지는 않겠다. 오히려 난 철저하게 법이 존재해야 인생의 9할 이상은 정직하게 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정말 맹세코 주변 친구들에게 3만원, 5만원, 많아야 10만원 내외로 빌려줬으면 빌려줘봤지, 살면서 돈을 빌려본 적은 없었기에 양심에 손을 얹고 ‘사기 사건’과는 1도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만약 누가 나를 고소했다면 동명이인을 잘못 고소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제가 뭔가를 잘못했다면 경찰서 가서 조사 받으면 판가름 나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등기로 출두명령서와 관련 서류 보낼 테니 거기에 쓰여진 장소에 시간 맞춰 꼭 나오세요.”
뚝. 전화는 끊겼고,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어떻게 해! 누가 날 고소했다고, 출두명령서 등기로 보낼 테니까 그거 받고 경찰서로 나오래!”
“엥?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그거 보이스피싱 아니야?”
“근데 보이스피싱이라고 하기에는 발음 같은 것도 조선족 아닌, 완전 한국인이었고… 티비에서 볼 법한 그런… 뭐랄까, 중년의 아저씨가 엄청 침착하게 말하고 하니까…”
“일단 진정하고 112에 전화해서 이런 저런 내용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보이스피싱이냐고 물어봐봐!”
“이런 걸로 112에 전화해도 되는거야? 아 무서운데…”
“일단 전화해봐.”
남자친구의 권유에 힘입어 112에 전화를 걸었다. 법을 전공으로 공부하긴 했지만 살면서 내 손으로 112를 눌러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게 확실한 것이 아님에도 왠지 모르게 손이 떨리고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네 112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상한 전화를 받았는데요.”
“네 어떤 전화를 받으셨죠?”
“저한테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이라고 하면서 전화가 왔는데, 제가 고소를 당했고 그래서 내사 중인데 제 통장을 압수수색 할 거라고… 그리고 저한테 등기로 출두명령서를 보낼 거니까 그 장소로 시간 맞춰 나오라고 했는데, 이거 보이스피싱인가요?”
“네, 보이스피싱입니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는 그렇게 전화로 고소 당했으니 어디로 나와라, 내사 중이다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해당 전화번호를 저희한테 알려주시겠어요? 그리고 그 번호는 꼭 차단을 하세요.”
아, 정말 다행이다. 정말 정말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친절하게 상담해주신 경찰관 덕분에 불안했던 마음이 금세 가라앉았다. 동시에 하루에도 수십 통 이상 이런 일로 전화를 받을 그 분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하며, 이렇게 죄를 지었을 ‘가능성’만 제기되어도 불안한데 정말 죄 짓고는 못 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해프닝이 매듭지어진 후, 다시 평화롭고도 단조로운 일상을 이어갔다. 그 일을 까맣게 잊었을 때쯤, 외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바로 옆에 있던 우편함으로 자연스레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우편함에는 하얀 서류 봉투가 꽂혀 있었고, 불현듯 얼마 전의 보이스피싱이 생각났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우편함으로 다가갔고,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살짝 들어올린 그 하얀 무언가는… 어떤 세무사가 자신의 사무실을 홍보하기 위해 보낸 홍보 책자가 담긴 서류 봉투였다. 한껏 긴장해 있다가 진실을 확인하니 조금은 맥이 빠졌지만,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후로도 열흘 가량 거의 매일 긴장하며 우편함 앞에 섰지만, 출두명령서는 1년 가량 지난 오늘까지도 날아오지 않았다.
그 때의 난 왜 그렇게 긴장하고 불안해했던 것일까? 만약 똑같은 내용을 전화가 아닌 문자로 받았어도 그렇게 떨어댔을까? 대답은 아마도, ‘No’였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광고나 홍보를 가장한 스팸 메세지, 보이스피싱 문자를 많게는 수십 통 받는다. 사용하는 메일 주소가 여러 개일수록, 사용하는 SNS 갯수가 많을수록 스팸 메세지와 보이스피싱에 노출되는 정도는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에도 수 개, 수십 개의 쓸모 없는 메세지에 노출되는 우리는 문자나 메일에는 무덤덤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전화라면? 그것도,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정확히 알고 나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전하는 메세지라면?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뉴스나 신문에서 <20억대 사기 사건 발생! 피해자만 수 백 명!>, <노인들 상대로 건강보조식품 팔아… 사기단 10명 집단 구속> 등 사기 당한 사람들, 사기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사건들을 다룬 기사에 달린 댓글이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저런 사기 수법에 당한다고? 나라면 절대 안 당할 것 같은데. 뻔히 사기인게 다 보이는데 속는다고? 쯧쯧 저게 다 멍청해서 그런거야.”와 같은 반응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전화 보이스피싱을 직접 당해본 사람으로서, 사람은 당황하면 이성적 사고와 판단이 멈춰버리면서, ‘평소 저 사람의 성격과 행동으로 보건대, 저 사람은 절대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랬대?’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정도로 상식 밖의 행동이나 평소 자신의 행동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기 마련이라는 것에 크게 동의한다. 더불어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의 너비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어떤 사건이 지극히 비정상적으로 여겨지지만, 누군가에게는 ‘말이 될 수도 있는 일, 정상적인 범위의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성한다. 그간 나의 경험과 그로부터 생성된 잣대로 다른 사람을 쉽게 평가하고, 쉽게 비난하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본다. 생각보다 쉽게, 또 빠르게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재단했었던 과거가 비교적 많이 떠올라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는 잘났고 다른 사람은 바보에 못났기 때문에 그런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각자의 경험의 너비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늘 기억하자. 그리고 나의 알량한 기준과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지 말아야 함을 마음에, 머리에 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