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상형이 ‘공유’도 아닌, ‘월급쟁이’인 이유
“어떻게 해도 딸은 결국 저희 아빠 닮은 남자를 만나게 되어있다니까? 쩌렁쩌렁하게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거야! 더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거라고!’라고 말해도 결국 데려오는 남자를 보면 결국 지 아빠 닮은 남자를 데려오더라고.”
초등학교 고학년 때로 기억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입김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던 그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부엌에서 조금 이르게 저녁 식탁에 오를 반찬을 준비하는 엄마에게 “학교 다녀왔습니다!”를 외치고 방에 가방을 던져넣었다. 닭살이 살짝 돋을 정도로 추웠던 탓에 거실 바닥에 깔린 따뜻한 이불 속으로 발을 집어넣고 티비를 보다가 아랫목의 따뜻함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이 들었다. 내가 잠이 든 것을 알고 베개를 머리 밑에 넣어주던 엄마의 손길이 어렴풋이 느껴졌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낮잠의 달콤한 편안함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참 자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우리 호들갑쟁이 둘째 이모(둘째 이모를 볼 때면, 자매들 중에는 셋째이지만, 둘째인 우리 엄마를 제외하면 내가 부를 때는 ‘둘째 이모’가 맞는 말임에도, 매번 내가 둘째 이모를 ‘둘째 이모’라고 부르면 셋째를 왜 둘째로 부르는지 헷갈려 하는 외할머니가 떠오른다)가 놀러왔다. 둘째 이모는 아들만 둘이라서 딸이 있는 우리 집과 막내 이모네 집을 늘 부러워했다. 이 날도 둘째 이모의 방문으로 우리 엄마는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 짓고는 거실에 간식거리를 들고 와 자고 있던 내 옆에서 이모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어떤 대화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잠결에 어렴풋하게 ‘사람들이 대화를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얼거리는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선잠이 이어졌고, 선잠 끝에 나는 서서히 현실세계로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이 따스한 공기와 엄마와 이모의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만들어내고 있는 다정한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눈을 감고 조금 더 잠든 척 누워있기로 결정했다. 착한 아이는 남의 말을 엿듣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원래도 이모와 엄마는 내가 옆에 있든 없든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기 때문에 좀 더 눈 감고 들려오는 대화를 마치 라디오 켜놓은 것처럼 들어도 괜찮겠지, 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했다.
“형부는 얘 시집가면 어떻게 한대? 얘도 이렇게 저희 아빠밖에 모르고 형부도 얘라면 끔찍하잖아. 눈물이 앞을 가려서 시집 보내겠어?”
이야기가 왜 여기까지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모는 어느새 자고 있는(이라고 쓰고 ‘자고 있는 척 하던’이라고 읽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글쎄다. 그리고 얘한테나 좋은 아빠지, 나한테도 좋은 남편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얘 동생한테는 얘한테 하는 만큼 해주지도 않아.”
엄마의 말은 그 어렸던 내가 들어도 맞는 말이었다. 왜 어린 아이와 강아지들도 표현은 안(혹은 ‘못’) 하지만 다 안다고 하지 않던가? 누가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내가 어디에 줄을 서야 제대로 줄을 서는 것인지를. 열 한 두어 살 나이의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아빠는 남동생보다 나를 훨씬 더 예뻐하고, 내가 애교를 조금 부리면 아빠 기준에서 ‘절대’ 안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사실을. 심지어 ‘엄마가 반대를 해도’ 말이다. 어릴 때는 이게 얼마나 든든하고 어깨뽕이 절로 솟는 일이었는지, 아빠가 나를 편애한다는 사실이 정말 좋았다. 그래서 미취학 아동 시절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 자주 했던, “크면 아빠랑 결혼할거야!”라는 말이 이 세상이 허락해주지 않는 불법(不法)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는 아빠와 결혼하겠다는 말 대신 “나중에 아빠 같은 사람이랑 결혼할거야!”라는 말을 줄곧 하곤 했었다.
그런 내가 바뀌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180도> 바뀌었다. “어떻게 해도 딸은 결국 저희 아빠 닮은 남자를 만나게 되어있다니까? ‘나는 엄마처럼은 안 살거야! 더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살거라고!’라고 말해도 결국 데려오는 남자를 보면 결국 지 아빠 닮은 남자를 데려오더라고.” 라는 이모의 말이 이해가 안 되던 내가, 이 말을 온 몸으로 거부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어린 시절 유독 아빠와 유대감이 짙었던 데 따른 반작용이었을까, 혹독한 사춘기를 겪었다. 크게 반항해서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뺨까지 맞아봤을 정도였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면서 남의 것을 훔치거나 가출을 하는 등 크게 엇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아빠 말이라면 껌뻑 죽고 애교 많고 착하던 딸이 변해버렸으니, 뺨을 수 차례 때려서라도 정신차리게 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지금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그 때 당시의 나는 당연히 그 마음을 미처 헤아릴 수가 없었고 마음 속에 미움만 쌓여갔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송두리째 휩쓸어버릴 것만 같던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내가 어느 정도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은 고등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하다보니 근방에서 명문대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공부 잘 하는 애들이 많은 유명 사립 여고에 진학하게 되었다. 사립 학교이고 고등학생이다보니 수업료와 급식비를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로 자잘하게 학교에 내는 돈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적지 않은 돈’이 문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나는 “아빠 같은 사람과는 결혼하지 않을거야 절대로!”를 외치는 딸이 되어 있었다.
학교가 만만치 않은 사립 학교이다보니 주변 친구들 중 꽤 잘 사는 친구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은행에서 한 자리 하시는 임원분이라던지 고위 공무원이라던지, 사업차 해외로 자주 떠나시는 분이라던지… 지금이라면 그냥 ‘아 그렇구나’ 할 일이지만, 그 때는 그게 왜 그렇게 멋있어 보이고 부럽던지. 설상가상 작게 개인 사업을 하고 있던 아빠의 사업이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주변 친구들과 나의 간극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급식비를 제때 내는 달보다 그렇지 못한 달이 훨씬 많았고, 점심 시간마다 급식실 담당 관리 선생님께 불려가 언제쯤 급식비를 낼 수 있는지 부모님께 확답을 받아오라며 하루도 빠짐 없이 들들 볶아질 때면 가족을 돈 걱정하게 만드는 아빠가 미웠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한 엄마가 식당에 나가 서빙을 하며 생계전선을 이끌어 나가게 한 아빠가 또 미웠다. 그래서 보란 듯이 들으란 듯이 더 크게 외쳤다. “아빠 같은 남자랑은 절대 결혼하지 않을거야!”
아빠도 누군가에게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엄마에게는 부족한 남편이었을 수 있고, 우리에게는 부족한 경제적 지원을 해줬을 수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하다 돌아가신 할머니에게는 착한 막내 아들이었을 것이고 친구들의 어려운 일에는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좋은 친구였을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경제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아빠는 자식들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고 뒤에서 지켜봐주는 아빠였고, 시간 날 때마다 우리를 데리고 가까운 곳으로나마 여행을 떠나며 두고 두고 돌아볼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 주었다.
사실 “아빠 같은 남자는 절대 만나지 않을거야!”라는 나의 말은 절대적으로 <경제적인 것>에 국한된 말이었다. 30년의 세월을 앞지른 일종의 ‘얼리어답터’였던 아빠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퇴사하고 자기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듯이, 결혼하고 내가 생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체를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나와 남동생이 어렸을 때는 그럭저럭 먹고 살 만 했고 어렵사리 내 집 마련까지 성공했으나 우리가 커가기 시작하면서 들어가는 돈이 많아지자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때마침 너무나도 발전한 기술 속도를 나이 들어가는 아빠가 따라가지 못하면서 사업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종국에는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불안정함이 싫었다. 내가 늘 바랐던 것은 안정이었다. 안정이 있어야만 엄마 아빠도 다투지 않고 나도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때 이후로 우습지만 나의 이상형은 잘생긴 남자도, 키가 큰 남자도 아닌 ‘월급쟁이’였다. 요즘이야 스타트업에 다니거나 개인 사업을 하거나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비교적 여유롭게 적정 수준 이상의 돈을 버는 사람을 가장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으로 치켜세우지만, 나는 뭐니 뭐니 해도 통장에 날짜만 되면 꼬박 꼬박 한 달 일한 값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정확하게 찍어주는 회사에 다니는 성실한 월급쟁이와 결혼하고 싶었다. 물론 나도 그런 월급쟁이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결론적으로 나는 꿈을 이루는 것에 실패했다. 그리고 꿈에 그리는 이상형을 만나는 것에도 실패했다. 많은 회사의 문을 열심히 두드렸지만, 이 사회는 날 월급쟁이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또 보고 자란 것이 자유로움 밖에 없어서 그런지, 만나는 남자들도 대부분 회사원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딸은 대부분 아빠 닮은 사람을 만난다>,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한 애들이 보면 딱 자기 엄마랑 똑같이 살더라>라는 말이 참 싫어서 이런 말을 듣는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아빠라는 사람 자체가 싫어서도 아니고, 우리 엄마라는 사람 자체가 미련해 보여서도 아니다.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면 남은 인생도 내가 싫어하는 불안정성 속에서 살 것 같아서 싫었고, 엄마처럼 살면 마음 한 켠으로는 누군가를 계속 미워하면서 살 것 같아서 싫었다. 하지만 지금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 나는 아직 미혼이기 때문에 ‘엄마처럼’은 아니지만, 적어도 ‘아빠처럼’은 살고 있고 ‘아빠 닮은 사람’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막상 이 생활 안에 들어와보니, 아침에 눈을 뜰 때와 저녁에 눈을 감을 때 약간의 불안함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아마도 불안함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의 희열과 행복감이 더 큰 탓일 것이다. 또 ‘아직은’ 나 자신 외에 책임져야 할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이다. 아빠 닮은 사람은 죽어도 만나지 않겠다던 딸은 월급쟁이를 만나기는 커녕 아빠 똑 닮은 사람을 만나 아빠 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 이 여자의 삶이 도대체 어떻게 흘러갈지! 또 모르지,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책임질 대상이 생기면 “아휴! 그 때 내가 왜 월급쟁이를 못 만나서! 그 때 왜 취업에 성공하지 못해서! 아이고 내 팔자야.”라고 우리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한탄할 날이 올지도. 하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련다. 이렇게 자유로이 하고 싶은 일 하고 살다가 언젠가 로또 1등에 당첨 되어 월급쟁이 아니어도 돈방석 위에서 짜릿한 웃음을 지으며 안정적으로 살 날이 올 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러니 적어도 지금은 이 자유로움과 책임질 대상 없는 때의 가벼움을 온전히 느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