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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Jun 14. 2020

엄마가 그리울 때면 그녀는 된장찌개를 끓인다.

우리집 냉장고 두 번째 칸 가장 안쪽에는 불투명한 하얀색 통이 하나 있다. 의아할 만큼 몇 년 전부터 옴짝달싹 하는 법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이쯤 되면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라도 한 번 꺼내어 열어볼 법 하건만, 우리 가족 중 그 누구도 그 통의 정체를 확인해본 사람은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 끓일 거야. 앉아서 멸치 좀 다듬어.”


아- 된장찌개. 엄마의 된장찌개는 참으로 특이하다. 청국장과 된장찌개의 중간 지점 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어 독특한 향과 맛이 있다. 냄새는 빼도 박도 못하게 청국장인데 맛은 칼칼한 된장찌개다. 청국장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집밥의 기본이자 정석이라는 된장찌개가 여느 집 엄마들의 ‘그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은 꽤나 달갑지 않았다.


“엄마, 우리집은 된장이 좀 이상한 것 같아. 이상하다기보다는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친구네 집에서 먹어본 된장찌개나 식당 가서 먹는 된장찌개는 향도 맛도 그냥 딱 ‘나 된장찌개다!’하고 자기 주장이 강한데, 우리집은 청국장이랑 된장찌개가 짬뽕이 된 것 같아.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느낌?”


“너 우리집 된장이 어떤 된장인 줄 알아? 이게 더 맛있고 건강에 좋은 거야.”라는 말과 함께 냉장고 문을 연 엄마는 베일에 쌓여있던 두 번째 칸에 위치한 그 통을 신줏단지 모시듯 떨어뜨릴라, 깨뜨릴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맞다, 엄마 그 통에 뭐 들어있는 거야? 꽤 오래 전부터 냉장고에 있던데.”


“이거? 할머니가 만들어준 된장. 이게 마지막이야. 그래서 아껴 먹고 있어. 이젠 어디에서도 못 구하니까.”


그렇다. 냉장고 한 켠에서 자기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던 그것의 정체는 바로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직접 띄운 메주로 만든 된장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대화가 이어지던 그날로부터 딱 5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전에 만들어 주셨던 그 된장.


그리움의 잔상이 그대로 담긴 된장찌개  ©푸들 with 스튜디오 크로아상


외할머니는 참 평범한 할머니였다. 길에서 흔히 마주하는 할머니들처럼 금방 풀리면 돈 아깝다며, 일 년에 한 번 미용실에 갈 때면 있는 힘껏 빠글빠글하게 머리를 볶았다. 옷은 또 어떠한가. 시장에서 산 총천연색 꽃무늬 고쟁이 바지를 입고 레이스 양말에 흰 고무신을 매치하는 패션 센스를 갖추셨다. 하지만 이처럼 평범한 그녀의 외관과 달리, 넘치는 손재주를 가진 할머니는 어렸던 나의 눈에는 대단한 능력자로 보였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손길로 다스려지는 집은 마치 보물섬과도 같았다.


할머니 댁 다락방에는 천장에 매달아놓은 줄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어, 하루 하루 시간이 가면서 곶감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호랑이보다도 더 곶감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다락방 문을 열어젖히며 언제 곶감이 완성되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러다 결국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을 이기지 못하고 할머니 몰래 감을 떼어먹다가 들켜 혼쭐이 나곤 했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이면 뜨겁게 펄펄 끓어오르는 방 아랫목에서 꼬릿꼬릿한 냄새를 풍기며 띄워지고 있는 네모 반듯한 메주를 보는 것도 큰 재미이자 놀이였다. 한 손으론 코를 쥐어 막고 한 손으론 메주 주위를 맴돌면서 할머니 몰래 네모 반듯한 그것을 꾹꾹 눌러가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곤 했다.


6남매가 모두 모이는 날이면 아들, 딸들에 이어 사위와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까지 먹이기 위해 큰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여 갓 잡은 토종닭으로 백숙을 만들기도 했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매 끼니를 준비하면서, 저마다 한 그릇씩 먹을 수 있도록 시래기 된장국, 미역국 같은 것들을 한 가마솥 끓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작은 체구의 할머니 만큼 커다란 국자로 가마솥 안을 휘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뜨거운 가마솥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 불을 어렵지 않게 다스리는 손길에 어린 나이에도 경이로움을 느꼈다.


이 모든 것들이 남긴 잔상 때문일까. 어려서부터 나는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시골’이라 부르던 할머니 댁에 한 달, 두 달씩 꼬박 머무를 수 있었던 방학을 좋아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시골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정답게 느껴졌고, 하루 종일 지치도록 뛰어놀다 너른 할아버지의 논밭 너머로 석양이 저물어가는 것을 매일 볼 수 있는 것이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입에 안 맞는 반찬 때문에 행여 손녀가 밥을 먹지 않을까 걱정이 된 할머니가 읍내 마트에서 소세지와 조미김 등을 사서 서투르게 부쳐낸 반찬을 올려둔 식탁에 앉으면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서울에서 엄마가 해주는 반찬들이 아닌, 할머니가 투박하게 무친 된장과 들기름 냄새 고소하게 올라오는 나물 반찬을 먹는 게 더 좋았다. 엄마, 아빠 옆에선 볼 수 없고 서울에선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지척에서 반짝이고 있는 할머니 곁과 시골 그리고 그 속에서 나를 풍성하게 채워주었던 소박한 시골 음식들을 난 사랑했다.


Photo by Kim Deachul (https://unsplash.com/photos/NOAzwcMzZJA)


난 이것들이 언제까지고 공기처럼 햇살처럼 주위에 머무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마주하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 되었고, 이제는 영원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할머니는 암에 걸려 힘겨운 투병의 시간을 보내셨고, 그 시간 동안 아들, 딸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 할머니가 남길 수 있는 것은 몇 마디 말, 그저 그 뿐이었다. 두터운 두둑 같았던 75년 세월이 나의 손을 꼬옥 쥔 채로 남긴 마지막 말은 “밥 잘 챙겨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 속 썩이지 말고”였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앞길이 구만 리인 손녀 딸 입에 들어갈 밥 걱정을 하는 그 마음은 어땠을까. ‘내 딸 힘들게 하지 말래이’라며 딸의 딸에게 당부를 남기는 그 마음은 어떠했을까. 단출한 한 마디였지만 그 속에 담긴 감히 혜량 할 수 없는 깊은 사랑에 눈물이 차오를 새도 없이 멍해졌다. 그게 그녀와 나의 이 생에서의 인연의 끝자락 모습이었다. 






가벼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냄비 속에서 넘실대고 있는 멸치를 건져낸 육수에 할머니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그녀의 손맛이 담긴 마지막 된장을 한 숟갈 조심스레 떠서 슬슬 풀어준다. 나의 엄마는 그녀의 엄마를 떠올리며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을 때, 엄마 생각 날 때만 끓여서 먹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딱 한 끼 분량 만큼의 된장찌개를 끓여낸다. 그러고 나서 된장이 든 통의 뚜껑을 덮고 냉장고를 연 후 두 번째 칸 안쪽 그 자리에 다시 통을 밀어 넣는다. 아마도 한동안 저 통은 다시 제자리를 굳게 지키게 될 것이다. 엄마가 다시 엄마의 엄마를 그리워하기 전까지는.


아직 넣어야 할 재료는 많지만 된장을 풀어낸 국물에서 벌써 아련한 향이 코 끝을 찌른다. 아직 쟁반 위에 남아있는 멸치를 다듬던 손을 잠시 거둔 채 눈을 감고 기억 회로를 되감는다.


마당에선 아이들이 정신없이 놀고 있다. 한겨울 눈이 펑펑 내려 어린아이의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다. 손가락이 다 얼 때까지, 양말이 모두 젖어 축축해질 때까지 한참을 뛰어놀다 들어온 아이들은 한여름 정오보다도 더울 정도로 따뜻하게 바닥을 데워 놓은 메주 방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띄워지고 있는 메주 옆에 털썩 누워 거추장스럽다는 듯 장갑과 양말, 모자를 벗어 던진다. 이어 방 한 켠에 곱게 개어진 이불을 흩어버리고는 그 속에 들어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행복한 아이들 속에 한 소녀가 있다. 내가 있다.


Photo by Michal Janek (https://unsplash.com/photos/1d1l3gU1PQk)


“똥강아지들, 얼른 와서 저녁 먹어라. 식기 전에 어여들 와.”


이불 속에서 굼뜨게 꾸물거리고 있는 손주들을 재촉하는 주름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이어 구수하지만 약간은 알싸한 향이 코를 찌른다. 엄마의 된장찌개와 꼭 같은, 청국장과 된장찌개 사이 그 어딘가의 향을 가진 그 찌개의 맛이 코 끝으로, 입 안으로 밀려든다. 따스함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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