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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들 May 06. 2020

내 인생 첫 기억의 시작, 그곳엔 진라면과 우유 한 팩

사금 같이 반짝이던 보통 날들에 대한 회상

내 인생의 첫 기억, 그 시작은 반지하 단칸방이다. 홀로 나서는 세상으로의 첫 발걸음이 시작되었던 것도 그 시절, 이 곳에서였다.


내가 6살 그리고 동생이 5살, 반지하 단칸방에 살던 시절. 일요일 오후 12시가 지날 무렵이면 어김없이 우리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흘러나오는 소리에 딱히 귀 기울이지 않고 라디오처럼 마냥 틀어놓는 텔레비전을 앞에 두고 동생과 투닥거리며 놀고 있다가도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야트막한 방 문턱을 뛰어넘어 주방으로 달려간다.


“옆, 옆 수퍼 알지? 가서 진라면 순한 맛 2봉지랑 서울우유 한 팩만 사와.”


“그럼 나 먹고 싶은 것도 살래요!”


“아이고, 그래. 대신 한 사람당 한 개씩만 사는 거야? 그리고 과자는 밥 먹고 나서 먹는 거야, 알겠지?”



엄마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왼쪽, 오른쪽 구별할 새도 없이 신발에 발을 구겨 넣고 동생과 함께 집 밖으로 뛰어나간다. 세 집이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있는 건물의 담벼락을 따라 대문을 나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아이 발걸음으로 채 서른 걸음도 되지 않는 곳에 ‘수퍼’가 있다. 간판엔 버젓이 ‘수퍼마켙’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우린 그냥 ‘수퍼’라고 불렀다. 슈퍼도 아닌 수퍼. 동생과 나란히 손을 잡고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수퍼집 아줌마가 “아이구 오늘은 둘이 왔어?”라며 어린 것들의 안부를 살뜰히 챙겨 묻는다. 그럼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 “엄마가 진라면 순한 맛 2봉지랑 우유 사오라고 해서, 우린 그거 살 거예요”라고 말한다.


아줌마가 검정 비닐 봉다리에 라면과 우유를 넣는 사이, 두 꼬마는 세상 모든 고민을 다 떠안은 표정으로 오늘 먹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과자를 고르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한다. 수퍼집 아줌마는 그런 남매가 귀엽다는 듯 계산을 기다려줬고,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과자를 집어든 누나는 동생의 과자까지 야무지게 검정 봉다리에 넣으며 엄마가 준 반으로 접힌 지폐를 내민다. 아직 돈 계산이 서툰 아이들을 대신해 아줌마는 알아서 계산을 마친 후 동전 몇 개를 고사리 손에 쥐어주며, 집이 코앞임에도 수퍼 문턱까지 나와 아이들이 돌아가는 뒷모습을 지켜봐 주시곤 했다.


집으로 돌아가 냄비에 물을 끓이고 있던 엄마에게 검정 봉다리를 건넨다. 진라면 순한 맛 2봉지. 끓는 물에 건더기 스프와 국물 스프를 차례대로 넣고 면을 넣어서 퍼지게 끓인 라면. 다 끓여진 라면은 나무 소반 위에 냄비째 올려졌고 국그릇 3개와 함께 거실로 날라졌다. 텔레비전 앞에서 라면이 끓기만을 기다리던 우리는 엄마의 “밥 먹자” 소리에 소반 앞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고, 제각기 앞에 놓인 국그릇에는 제 소임 만큼의 분량이 담겼다.



여기까지가 내 인생 첫 기억의 시작이자 도전-아이에겐 심부름도 도전이라면 심오한 도전이다-의 역사의 시발점이다. 앨범 만큼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가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우리 가족은 행복하고 단란하며 때론 우습고 때론 짠한 모습이 다채롭게 담긴 사진을 잔뜩 가지고 있다. 수목원에 소풍 가서 고모와 함께 유모차를 밀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엄마의 모습, 새로 뽑은 아빠 차 앞에서 브이를 그리고 있는 내 모습, 처음으로 앞니 두 개를 한꺼번에 뺀 후 개구진 표정으로 보조개 미소를 짓고 있는 동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처럼 그 무렵의 우리에겐 매일이 추억거리이자 빛나는 사금 같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추억들이 가득 담긴 사진에서와 같은 기억을 뒤로 하고, 언제나 언제나 내 인생의 시작점엔 진라면과 서울우유 그리고 대문을 박차고 해맑게 뛰어나가던 6살, 5살 꼬마 두 명이 있다.




때론 조금 더 멋진, 따뜻한, 재미있는, 감동적인 기억이 내가 기억하는 인생의 처음이자 시작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5살이 되도록 왼쪽과 오른쪽 신발을 구별하지 못하고 발을 마구 구겨넣고야 마는 어린 동생을 데리고 손에 쥔 몇 천 원으로 소박한 행복을 사러 뛰어갔던 그때 그 모습이 한 번씩 떠오를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왠지 모를 울컥함과 함께 따스함이 몽글몽글 수채화처럼 번져감을 느낀다.


천 원짜리 몇 장 손에 쥐고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하던 그 시절의 나,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처음 하는 심부름에도 설렘 만을 가득 안고 있던 나,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좌절을 몰라 도전이라는 거창한 말 앞에서도 자신감 있던 나. 6살의 나와 20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나는 인생의 처음과 살아온 날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이렇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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