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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거운 하루 Nov 21. 2022

교실 기록

오롯이 나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하게 되면 오랜 시간 잊히지 않는다. 조선시대 왕들은 사관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는 것을 알고 조심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자신의 말을 곡해하여 기록할까 염려하는 왕의 말이 그대로 적혀 있기도 하다.


한 학기마다 학급일지를 만들어서 아이들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왼쪽에는 아이들의 이름이 번호대로 적혀 있고 오른쪽에는 시간별 수업 계획을 적는 칸, 아래에는 중요한 일을 적는 체크리스트 칸으로 나뉘어 있다. 아이 이름 옆 빈 칸에는 결석 사유나 과제 제출을 했는지 표시한다. 그리고 교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다.


교실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는 것은 대부분 좋지 않은 일들이다. 언제, 누구를 싸웠다거나 욕을 했다거나, 친구 물건을 가져갔다거나, 카톡으로 나쁜 말을 보냈다던가 하는 일들이다. 좋지 않은 일들이 자주 기록되는 학생은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 사실을 알려드리고 가정에서 함께 지도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학생들이 모두 하교하고 난 빈 교실에서 학급일지를 앞으로 넘겨가며 적은 내용을 살펴보았다. 욕까지 상세하게 적어 둔 것들을 보니 이것이 학급일지인지 조사일지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그 기록만 보자면 아이들은 늘 싸우기만 하고 그런 아이들 때문에 늘 불행하기만 한 선생님이 된다.


그러나 어떤 날은 선생님 사랑한다는 고백이 적힌 쪽지나 빨간머리 앤 그림을 그린 종이를 받을 때도 있고, 연필로 서걱서걱 글씨를 쓰는 소리만 가득한 순간이 신기할 때도 있고, 유난히 아이들의 미소가 반짝이는 날도 있다.


그런 순간들을 예쁜 색깔 펜으로 적어두면 조금은 괜찮은 순간도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간 끊이지 않는 다툼과 깊이없는 사과, 누군가가 다치는 일, 유쾌하지 않은 학부모와의 일 등으로 자꾸만 힘이 빠질 때 나에게 주는 조그만 위로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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