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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Jun 19. 2020

어른들의 수다

유치한 대화가 오고 가는 일

6월의 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치킨 마리를 손에 들고  집으로 들어섰다. 바로 직전 족발집에서 동네 언니네와 우리 가족은 저녁을 먹고 나온 참이었지만, 치킨 배는 따로 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족발인지 고무인지 정신없이 입에 넣고 이야기를 하느라 허기가 돌 정도였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후다닥 들어가 안방에 장난감을 가득 채웠다. 아이 셋을 함께 들여보내고 살포시 문을 닫았다.

오, 살 것 같아! 이제 어른들의 수다 타임이다.      




언니 C와 형부는 우리 부부와 닮은 점이 많다. 동갑이라는 것, 어릴 적 친구였다가 10년 연애를 했다는 것, 서로의 흑역사를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 그래서 웃기려다가 오버해서 싸움으로 간다는 것, 그 싸움으로 눈치 보다가 조용히 수다의 장을 덮게 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웃기고 싶어서 상대방 흑역사에 조미료를 팍팍 칠 분위기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가 질문을 던졌다. “가위에 눌려 본 적 있는 사람?” 우리 부부의 나이 합이 74, 언니네 부부 나이의 합이 76. 합이 어마어마한 사람들끼리 모여 갑자기 가위에 눌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과 언니는 딱 잘라 말했다. “아니!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위에 눌려본 적이 없어.” 기가 센 편이라 잠만 잘 잤고, 가위에 눌리는 느낌이 뭔지도 모른단다.

서른 살 전까지, 나는 지긋지긋하게 가위에 눌렸다. 겁도 생각도 많아, 복잡한 꿈을 꾸다가 갑자기 몸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도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한 헛것을 보았고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입만 벙긋

벙긋,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풀릴 것 같은데 그게 어려웠다. 정말 누가 나를 누르고 있는 걸까. 무서운 마음에 최대한 잠을 늦게 자기도 했다. 그러다 몸이 뻣뻣해진다 싶으면 양쪽 엄지손가락을 재빠르게 흔드는 기술을 터득했다.

언니네 부부에게 촐싹맞게 양쪽 엄지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손가락 흔들기를 따라 하던 형부는 왠지 가위에 눌려 봤을 것 같았다. ‘형부, 이제 말해 봐요’라는 눈빛을 쏘니, 두 눈을 껌벅이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내가 중학교 때 길 가다가 ‘친한 척해, 친한 척해’ 형을 만나 구석으로 끌려간 적이 있었어.” 돈 숨기다가 들켜서 지갑의 텐션을 이용해 뺨을 얼얼하게 얻어맞고, 끝이 뾰족한 긴 구둣발로 명치를 맞았다 했다. 그 날 집에 와서 토한 뒤, 잠들고는 처음으로 가위에 눌린 거였다. 눈앞의 베란다에 어떤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며 형부는 치를 떨었다.       우리는 혹시 그 남자, ‘친한 척해’ 노는 형 아니냐며 웃음이 터졌다. 아이들이 그 웃음소리를 듣고 방문을 벌컥 열었다.  남편은 과자 두 봉지를 넣어주고 다시 그 문을 닫았다. 지켜보고 있던 언니는 잘했다는 무언의 사인으로 눈을 찡긋했다.      




“선숙이, 나랑 결혼해서 편하니까 가위에 안 눌리는 거 아냐!” 남편의 당당한 말투였다. 언니는 입막음용으로 그에게 맥주를 콸콸 따라 주었다. 무슨? 왔더? 결혼해서 편하다니. 물론 마음에 맞는 친구 같은 남편과 가족을 이루고, 재미와 안정감이 커진 건 맞다. 하지만 결혼해서 좋을 수는 있어도, 편한 건 아니지 않나.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편한 건 솔로일 때지.

그렇다면 결혼한 이후엔 왜 가위에 눌리지 않았을까. 내 배 위에 철근 같은 다리 한 짝을 올리고 자는 남편이 떡 버티고 있어서? 항상 내 옆에 같이 자는 누군가가 있어서 가위가 물러난 걸까. 아니면 출산 후, 애 보기보다 더 무서운 건 없었기에 곯아떨어져 잠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하얀 옷을 입고 천장에서 날 바라보던 헛것을 보았다한들, " 뭐, 어쩌라고! 짜져!"라고 격하게 반응했을지도.

가위에 눌린 이야기에서 시작해 결혼해서 편하니까로  수다의 밤은 깊어갔다. 시계는 열 시를 넘기고 있었다.      






언니네 가족이 돌아간 후, 남편은 거실 중간에 대자로 뻗어 잠들었다. 아이를 씻기고, 쌓인 술병과 치킨 뼛조각을 치우고, 아이 곁에 누웠다. 아이의 쌕쌕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생각해도, 오늘 수다는 좀 유치했다. 대신 웃겨서 옆 사람을 퍽퍽 치기도 했다. 형부 등도 마구 쳤던 것 같다.


건조하게 찌들었을, 하루가 고단했을, 정신없었을 어른들이 모여 유치한 대화가 오고 가는 일. 잠시 느슨해지는 시간은 우리에게 콕콕 스며든다.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어떻게든 단단한 에너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기에.

내일 눈을 뜨면 그 에너지의 한 조각을 떼어 나도 모르게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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