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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숙 Sep 09. 2020

14일간의 707호

드디어 중국, 격리 기록

 여행지 호텔에서 책을 읽어본 적 있었나. 욕심내어 두어 권 가져가, 밤새도록 술 마시며 떠드느라 책 읽을 새가 없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주류 금지에 호텔 방 안에서만 14일을 지내야 한다면? 여기 707호에서, 여행이 아닌 격리 생활 중 십 일이 지났다.  

    



 “선숙아, 책은 무조건 다 놓고 와! ” 주재원 발령으로 먼저 출국한 남편의 조언이었다. (그러는 본인은 무거운 플레이스테이션 본체와 더 무거운 골프채 세트를 챙겼다)

큰 캐리어 두 개, 백 팩, 아이까지 혼자 감당할 나를 생각해서였다. 책 한 권 한 권이 모이면 엄청나게 무겁다. 무게가 무서웠지만, 출국 전날까지도 야무지게 책을 샀다. 고심해서 선정한 열 권의 책과 지친 몸, 짐을 끌고 호텔 방에 도착했다. 한쪽은 완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갈색 책상, 단단해 보이는 주황빛 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까다로운 입국 심사와 살벌한 공항 분위기는 금세 잊어버렸다는 듯이.     

 

오일파스텔로 그려본 책상, 이런 걸 그릴 정신은 있었나 보다.


 책상 위, 우뚝 솟아오른 골드 색상의 조명이 시선을 끌었다. 유리창으로 내리쬐는 볕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일 인용 벨벳 소파가 있지만 대부분 책상에서 읽고 있다. 잠깐 침대에 엎드려서 보기도 하고. 이렇게만 보면 느긋한 격리 생활이다. 단, 아이와 함께 좁은 방에서 온갖 놀이로 힘을 탈탈 뺀다. 아이가 잠든다. 그리고 시작된다.




 쌕쌕 숨소리를 기본음으로 깔고, 책상에 앉아 조명 버튼을 누른다. 노란 기운이 감돈다. 카펫에 맨발을 올리고 폭신함을 느끼고 싶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에 슬리퍼를 챙겨 신는다. 책을 펼친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낯선 나라, 언어는 슬며시 사라지고 진짜 내 방이 되어 버린다. 이 새벽은 말이다.      




 이상한 소리 같지만, 호텔 밖을 나가면 약간 아쉬울 것 같다. 내가 ‘격리 체질 (너무 잘 지내는 나더러, 남편이 지어준 별명)’ 이라기보다는, 밤마다 책 읽던 순간들 때문이다. 바깥공기 한번 못 마시고도 우울하기는커녕 생기 있게 지낼 수 있었던 건, 바리바리 싸 온 책과 매끄러운 책상과 큼직한 조명 덕분이다.

 훗날 호텔에 가게 된다면 이렇게 책을 읽게 될까. 마시고 떠들면서도 문득 여기가 떠오를 것 같다. 가방 안, 얌전히 모셔 놓은 책을 슬그머니 꺼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 사이로 707호의 새벽은 묵묵히 흐른다.    


  




ps. 격리 호텔에서 나와 함께 한 책을 불러 본다. <소란, 여기서 끝나야 시작되는 여행인지 몰라, 자기만의 방,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사람에 대한 예의,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천천히 스미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아무튼 여름, 모지스 할머니의 크리스마스 선물>

어쩌면 지금의 내면을 드러내는 제목들 인지도 모른다. (‘술은 약해요’만 제외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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