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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희 Oct 12. 2023

공원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들

핀란드의 마지막 날이었다. 핀란드에 오기 전부터 가고 싶었던 공원이 있었다. 그런데 거길 갔다 오자니 뱃시간을 맞추기에 촉박했다. 갔다 찍고만 올 바에야 가까운 공원에 가서 좀 더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공원이라는 장소의 취지에 맞을 것 같았다. 구글 지도에 근처 공원을 검색했다. 벤치도 없을 정도로 작은 공원이었지만, 공원을 둘러싼 낮은 언덕 전체가 의자인 곳이었다.

한국에서 챙겨 온 연두색 돗자리를 핀란드 잔디 위에 깔았다. 여름휴가로 간 강원도 해변에도, 우리 동네 공원에도 깔았던 익숙한 돗자리. 익숙한 물건이 낯선 여행지에 들어서면 여행보다는 일상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어 좋다.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빠는 곯아떨어졌다.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같이 있지만 혼자일 수 있는 시간, 외롭지 않게 고독할 수 있는 시간이 계획 없이 찾아오는 게 반갑다.

잠깐 멀뚱 거리다 요가를 했다. 핀란드 하늘 아래서 요가를 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하늘은 하늘이었다. 몇 동작 움직이다 보니 공원에 얼마 있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려고 과한 동작을 하는 내 자신이 느껴져서 그만뒀다. 가빠진 숨, 붕 뜬 마음이 어느 정도 정돈이 된 다음 공원을 둘러봤다. ​


중년 남성 둘이 보였다. 언덕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계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어쩌면 그 나이대가 고루고루 섞여있었는지도) 헷갈리는 학생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쯤 될 것 같은 순박한 놀이를 하고 있었다. ​

공원 중심에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아빠가 있었다. 핀란드에선 아빠 혼자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걸 정말 많이 봤다. 특히 공원이나 동네 스포츠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들에 가면 그랬다. 우는 아이는 한 명도 보지 못했는데, 그래서인지 쩔쩔매는 아빠도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아빠는 그저 지켜본다.

우리 뒤로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운 여자가 하늘을 향해 책을 펼치고 있었다. 검은 헤드폰을 끼고 있었는데, 읽고 싶은 만큼 책을 다 읽었는지 어느새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을 듣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악에만 집중하면서 먼 곳을 바라봤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나까지 평온해지는 느낌. 내가 쳐다보는 게 느껴지지 않을 먼 거리라 다행이었다. ‘그래, 내가 핀란드에서 찾고 싶었던 게 이런 거였지.’ 눈꺼풀이 느슨해지고 먼 곳을 응시하게 하는 음악은 어떤 선율과 가사일까.

헤드폰 여자와 한참 거리를 두고, 책을 읽는 또 한 명의 여성이 있었다. 정갈하게 머리를 묶고 바른 자세로 앉은 채 책을 대했다. 그녀들을 보며 나도 한국에 가면 날이 좋은 어느 날 친숙한 우리 동네 공원에 가볍게 책 한 권만 들고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와 샤워를 할 때마다 헤드폰을 낀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여전히 그 노래가 무슨 노래였을지 궁금하다.

여전히 그 음악이 궁금할 때, 더 추워지기 전에 공원에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얇은 책을 챙기고, 핸드폰은 집에 둔다. 책과 나만 보내고 싶은 장소를 잠깐 떠올리다 멀리 가기가 귀찮아져 결국 집에서 도보 2분 컷인 폼나지 않는 벤치에 앉아 책을 펼친다.

‘그래도 됐다. 했다. 이대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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